지친 소련군은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수 없었다

르제프에서 시쵸프카를 거쳐 브야즈마에 이르는 철도를 따라 형성된 길이 130여 킬로미터, 폭 50여 킬로미터의 르제프 돌출부는 독일과 소련 모두에게 고민을 안겨주었다. 독일 제9군을 위시한 약 35만의 독일군이 몰려 있는 이곳이 스탈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했다. 그는 즉시 이곳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단지 지도 위에 그려진 전선만 놓고 본다면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그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상황이었다.

소련은 계속된 공세로 독일을 모스크바에서 한층 멀리 밀어붙이는 데 성공했으나 스탈린의 의도대로 심각한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르제프 전면처럼 막힌 곳도 있었거니와 전반적으로 소련군이 잘해서 전선 돌파에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주코프의 우려대로 1월 말이 되었을 때 소련군은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해 이 정도도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결국 전선은 곧바로 정체 상태에 빠졌다.

설령 스탈린의 명령이 아니어도 소련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르제프 돌출부를 제거하는 것이 좋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전력을 회복한 후에 공격을 재개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 사이에 독일의 전력 또한 회복될 것은 불문가지였다. 결국 1943년 초여름까지 마치 제1차 대전 당시의 서부전선처럼 강력하게 구축된 양측 진지를 사이에 두고 주기적으로 공세와 격퇴가 반복되었다.

하지만 소련군의 호된 반격을 연이어 당한 독일의 입장은 달랐다. 독일 제9군의 배후가 절단될 위험이 크다고 본 것이다. 한마디로 르제프와 브야즈마를 너무 잘 방어하다 보니 고립의 위기를 자초한 셈이었다. 비록 주변 부대가 밀려나기는 했지만 이들이 못해서가 아니라 제9군이 너무 잘해서 이런 당혹스러운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독일 제3기갑군이 후방 통로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결코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히틀러는 방어전의 귀재인 모델을 9군 사령관으로 발탁했다

전면 방어에 성공하면서 본의 아니게 돌출부 형성에 일조한 독일 제9군 사령관 스트라우스(Adolf Strauss)는 르제프 포기를 진지하게 검토했다. 사실 독일의 입장에서도 돌출부를 포기하고 전선을 단축하는 것이 차후의 위험을 제거하고 전력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이런 의사를 제대로 표하기도 전에 그는 모스크바 전투 패배 이후에 불어닥친 대대적인 지휘관 물갈이에 휩쓸려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히틀러는 추후 모스크바 점령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르제프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돌출부 좌우에 있는 소련군을 격퇴해 전선을 1941년 12월의 상황으로 되돌릴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여전히 현지 사수 명령만을 반복한 히틀러는 신임 제9군 사령관으로 군부 내의 무수한 선임들을 제치고 친(親)나치이자 자신을 특별히 잘 따르던 인물을 발탁했다. 이는 총통의 자격이 아닌 스스로 차지한 육군 총사령관으로서의 인사 조치여서 즉각 실행되었다.

1월 15일, 현지에 부임한 신임 제9군 사령관은 전선을 돌아본 후 비록 반 이상은 포위당한 상황이었지만 소련군이 진격 열흘 만에 더 이상 힘을 못 쓰고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정확히 파악했다. 전선의 신장(伸張)과 혹한, 그리고 폭설로 인해 보급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던 것이었다. 지난번 독일의 모스크바 공격을 막았던 혹한이 이번에는 소련군의 역공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어 있었다.

지도 위에 그려진 불안한 전선의 모습과 달리 결코 소련군이 우세한 상황이 아니었다. 상대가 이미 공세종말점(攻勢終末點, 공세를 유지할 수 있는 한계점)을 넘었기에 더 이상 앞으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신임 사령관은 반드시 현지를 사수하겠다고 총통에게 보고했다. 자신을 신임하던 히틀러에게 허풍 섞인 아부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바로 1942년 르제프 일대에서 벌어진 피의 격전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모델(Walter Model)이다.

사령관 모델은 전선의 돌출 부위가 더 이상 위태롭지 않음을 확신했다

이후 방어전의 귀재로 널리 알려지는 모델은 원래 전차사단장, 장갑군단장을 역임한 저돌적인 지휘관이었다. 제41장갑군단장이 된 지 불과 두 달 만에 제9군 사령관으로 초고속 승진하자, 정작 장갑군단장으로 공세전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해 아쉽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방어전에도 마치 공격전처럼 종심에 배치한 강력한 예비대를 이용한 적극적인 전술을 구사했다.

모델은 소련군의 예상 접근로에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에 임하다가 만일 돌파당할 위기에 처하면 후방에 준비해 둔 강력한 예비대를 즉시 투입하곤 했다. 일견 히틀러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무조건 현지 사수가 아니라 방어 지역 전체를 하나의 영역으로 놓고 순차적 방어선을 설정하여 후퇴 지연전을 펼쳤고 적이 돌파에 실패하면 즉시 반격을 개시하여 종종 추격 섬멸하기까지 했다.

비록 모스크바 전투와 연이은 소련의 공세에 밀렸지만 모델이 신임 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당시에는 그래도 방어선이 상당히 든든하게 구축된 상태였다. 히틀러가 후퇴에 격노해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Walther von Brauchitsch)를 비롯한 수많은 지휘관들을 대거 해임하는 초 강수를 두면서 현지사수를 닦달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사실 르제프 돌출부의 형성도 이와 관련이 많다.

모스크바 전투를 총평할 때 히틀러가 일선 지휘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략적 후퇴를 하는 것이 옳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히틀러의 고집 때문에 오히려 소련의 반격을 조기에 막아내고 전선을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모델은 르제프에서 브야즈마에 이르는 전선이 상당히 위태롭게 돌출되어 있긴 하지만 쉽게 뚫리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모델은 돌출부 좌우의 소련군을 섬멸하기로 결심한다

지칠 대로 지친 소련군은 독일군의 방어선까지 접근한 후 정작 공격을 지속할 수 없었다. 스탈린의 닦달에 마지못해 일각이라도 돌파하려고 애썼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모델은 기갑부대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화력을 요충지에 대기시켜 놓고 있다가 위기가 발생한 곳에 신속히 투입하여 소련군의 공세를 꺾어버리고는 했다. 결국 혹한에 보급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소련도 진지를 파고 대치하는 방법 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모델이 부임한 지 불과 보름 만에 서서히 위기가 해소되고 있었고 오히려 초조한 쪽은 소련이었다. 지난 승리에 도취되었던 스탈린의 착각과 달리 아직도 전선의 주도권은 독일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독일의 방어선은 더욱 단단해졌고 르제프 돌출부는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변해 갔다. 결국 이때 형성된 울퉁불퉁한 전선은 1943년 5월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당시 독일은 바바로사 계획(Operation Barbarossa)에서 1941년 중에 점령하기로 했던 3대 목표 중 키예프를 제외하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공략은 실패한 상황이었다. 독소전쟁 최초의 전략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독일은 이들을 재차 공략하기 위한 거점이 필요했다. 히틀러의 주장대로 르제프 돌출부는 모스크바 중심까지 직선거리로 180km에 불과한 가장 가까운 점령지여서 단순히 효율성만 따져 포기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다분히 있었다.

결국 전선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르제프는 함부로 양보할 수 없는 뜨거운 감자가 되어 버렸다. 오히려 2월이 되자 전선의 상황은 독일 쪽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르제프의 상황은 역으로 생각한다면 돌출부 좌우의 소련군도 독일군 쪽으로 길게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모델은 이제 소련군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돌출부 좌우의 소련군을 섬멸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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