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외교적으로 종종 대립하곤 했던 미국과 영국이 공고한 동맹을 결성한 것은 제2차 대전 때부터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이 추축국의 일원인 일본에게 급습당하면서 자연스럽게 한편이 되었지만, 단지 그것 때문에 70년이 넘는 현재까지 최강의 동맹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정치 지도자들의 대를 이은 신뢰도 큰 역할을 담당했는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940년 6월, 프랑스의 항복 이후 독일에 맞서 홀로 싸우던 영국은 중립을 고수하는 미국을 제1차 대전 당시처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썼다. 1941년 8월, 처칠은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HMS Prince of Wales)를 타고 뉴펀들랜드 인근까지 직접 찾아가 루스벨트를 초대하는 데 성공했지만 단지 외교적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던 처칠에게 진주만 급습은 그야말로 고립을 벗어날 수 있는 호기였다.

불과 보름 후인 12월 22일, 미국을 방문한 처칠은 백악관 내의 귀빈 숙소에 투숙했다. 공식 행사를 끝낸 처칠이 숙소로 돌아와 목욕을 하던 중 마침 근처를 지나던 루스벨트의 사적 방문을 받았다. 망설임 없이 문을 연 처칠의 알몸을 본 루스벨트가 실례했다며 돌아가려 하자 처칠은 루스벨트의 팔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저는 각하에게 숨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위기에 처한 영국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을 기화로 처칠과 급속도로 친해진 루스벨트는 이후 배로 된 다리로 미국과 영국을 연결해 주겠다고 화답했다. 이때부터 미국의 산업 시설을 풀가동해 생산된 엄청난 물자들과 병력을 실은 수송선들이 종전될 때까지 쉴 새 없이 대서양을 왕복했다. 그중에서도 리버티선(Liberty Ship)은 루스벨트가 호언한 것처럼 대서양을 연결한 다리와도 같은 구원의 상징이었다.

리버티선은 전쟁 전부터 만일을 위해 건조되고 있었다

리버티선은 연합국에서 사용한 리버티급 수송선을 말하며, 1945년까지 총 2,710척이 건조되었다. 만재 배수량 14,245톤에 길이 134.57미터의 이 수송선은 제2차 대전 중 연합국의 생명선을 담당한 거대한 축이었다. 전쟁에서 연합국이 승리하게 된 이유는 많지만 그중 하나가 후방의 공장 역할을 한 미국의 무지막지한 생산력이었다. 리버티선은 이렇게 생산된 물자를 목적지까지 제때 운반한 일등공신인 셈이다.

리버티선은 전쟁 발발 전인 1936년, 미 해군이 평시에 민간에서 상업용으로 쓰다가 유사시 군용으로 즉시 임무를 전환할 수 있는 50척의 다목적 수송선을 발주하면서 탄생했다. 제1차 대전 당시에 사용한 이른바 호그 아일랜더(Hog Islander)급 수송선의 운용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이 이루어졌는데, 이때만 해도 그다지 큰 의의를 부여하기는 힘들었고 단지 만일을 대비한 기본적인 조치였다.

그런데 나치의 도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1939년에 100척, 그리고 이듬해에 200척의 추가 발주가 이루어졌다. 전쟁에 뛰어들 생각은 여전히 없었지만 적어도 화마가 미국까지 번질 때를 대비해야 했을 만큼 당시의 국제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것은 오랜 세월 고립주의를 고수했음에도 결국 제1차 대전에 휘말려 들어갔던 지난 경험에서 비롯된 예방적 대응이기도 했다.

미 해사위원회(United States Maritime Commission)가 유사시 군용으로 전용할 수 있도록 설계한 'EC2-S-C1'을 기초로 탄생한 리버티선의 이름은 1941년 8월 23일 건조된 실험용 초도 선박 엠파이어 리버티(SS Empire Liberty)호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그해 9월 제작된 양산형 1호선인 패트릭 헨리(SS Patrick Henry)호의 건조식에 참석한 루스벨트가 리버티선이라고 언급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미 해군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리버티선의 프로젝트를 주의 깊게 지켜본 영국은 그동안 소모된 수송 전력을 긴급 복구하기 위해 60척을 발주했다. 이때는 미국이 중립국이었지만 영국에 호의적이었고 무기나 군용 장비의 거래에 특별히 제한을 두지도 않았다. 메인 주에 위치한 토드 조선소(Todd Shipyards Corporation)에서 건조한 영국 해군용을 리버티선과 구분해 별도로 오션급(Ocean Class) 수송선이라 한다.

미국이 보여준 대량생산의 저력

이렇게 초도 선박들이 속속 완성될 무렵 진주만 급습이 벌어지면서 미국은 결국 전쟁에 발을 들여놓았다. 당연히 지금까지 준비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선단이 당장 필요하게 되었다. 개발과 제작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기 위해 새로운 선박 대신 기존에 사용 중인 수송선을 후보군으로 압축 심사해 리버티선을 양산 모델로 전격 채택했다.

미국은 대량생산에 효과적인 포드 방식(Fordism)¹⁾을 건조에 응용했는데, 사실 진정한 리버티선의 신화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프로그램 총책임자인 카이저(Henry John Kaiser)는 일부 설계를 변경하여 곡선 부위를 최대한 직선화함으로써 철판 가공 효율을 높였고, 규격화된 부품 공급을 기반으로 미리 블록별로 모듈을 제작한 후 기존의 리벳 대신 용접으로 연결시켜 작업 시간과 경비를 대폭 절감했다.

유류수송형, 병력수송형처럼 적재 화물에 따른 세부 모델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도면과 표준화된 건조 방식으로 미국 내 총 17개 조선소에서 동시에 제작된 리버티선은 그야말로 미국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상징이었다. 평균 건조 속도가 24일이었을 만큼 엄청났는데, 로버트 피어리(Robert E. Peary)호의 경우는 불과 4일 15시간 30분 만에 완공되어 다시 재현하기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될 정도였다.

더 놀라운 것은 비숙련공을 투입하고도 빠르게 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전시 체제로 바뀌면서 많은 남자 조선 기술자들이 징집되자 여성들이 공백을 담당했는데, 리버티선이 대량 생산되었던 1942~1944년에는 노동자의 30퍼센트 가량이 여성이었고 그중 20퍼센트 정도는 태어나서 한 번도 바다를 본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미국식 대량생산 체제가 만든 신화였던 셈이다.

묵묵히 역할을 수행한 리버티선은 전쟁의 숨은 주역이었다

이렇게 붕어빵 찍어내듯 바다로 쏟아져 나온 리버티선들은 물자와 병력을 가득 싣고 유럽과 태평양의 전선에 공급을 했다. 흔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등 공신으로 알려진 랜드 리스(Lend-Lease)²⁾에 의한 엄청난 물자의 지원은 리버티선을 비롯한 미국의 어마어마한 수송선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도 컸는데 당연한 일이겠지만 리버티선은 생산량이 많았기에 그 피해도 상당했다.

느린 속도에 비무장이어서 대서양의 늑대로 악명 높았던 독일 유보트들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후기 형에 자위용 함포가 장착되고 호위함들이 선단 보호에 나섰지만 전쟁 말기에 유보트 전력이 쇠락하기 전까지 언제 침몰당할지 모를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대양을 건너야 했다. 간과되고 있지만 미국 수송선단 요원들의 희생 비율이 육군 보병보다 높았을 정도로 그들의 임무는 위험했다.

게다가 원래 생산성에만 주안점을 두다 보니 설계상 내구연한이 불과 5년에 불과할 만큼 선체도 약했다. 이러한 구조적 결함과 함께, 제작에 비숙련공이 대거 투입되어 발생한 용접 불량 등의 이유로 선체와 갑판에 균열이 생기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운항 중 선체가 반으로 나뉘는 황당한 경우까지 벌어졌다. 놀라운 생산성을 자랑하고 전쟁 내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성능이 그다지 좋은 선박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열악한 성능에도 굴하지 않고 유보트가 출몰하는 거친 대양을 가로지르며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배달부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동시대에 활약한 수많은 다른 함정이나 군용 선박들과 비교해 멋도 없고 성능도 열악했지만 리버티선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진정한 바다의 마당쇠였다. 제2차 대전 당시 워낙 거대하고 많은 무기들이 활약했기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지는 않지만 리버티선은 승전의 당당한 주역으로 꼽힐 자격이 있다.

▌제원

배수량 14,245톤(만재) / 길이 134.57m / 폭 8.5m / 속력 11노트(시속 20.5km) / 항해거리 37,000km / 승조원 41명

▌주석

1) 자동차 생산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립라인 및 연속공정 기술을 이용한 표준화된 제품의 대량생산 체제.

2) 동맹국에의 무기 대여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