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은 승리에 도취되어 무리한 공격을 명령했다

독소전쟁은 규모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그중에는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극적인 전투도 많았다. 노도와 같았던 독일의 진격을 막아내고 전선을 정체시키는 데 성공한 모스크바 전투도 분명 이에 해당되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비록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지만 1942년 1월 7일, 소련은 전략적으로 의미 있는 최초의 승리를 거머쥐며 패전의 위기로부터 벗어났다.

전쟁 발발 이래 계속 주도권을 쥐고 쉴 새 없이 소련을 몰아붙였던 독일이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공세를 재개하는 데는 무려 6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처럼 감격적인 승리를 거두자 그동안 연이은 패배에 의기소침했던 스탈린이 다시 기고만장해졌다. 모스크바를 지켜내느라 지난 석 달 동안 독일보다 2배나 많은 120만의 사상자를 냈다는 사실을 그는 망각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즉시 추격을 실시하여 독일군을 완전히 격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위기를 간신히 틀어막은 소련군에게 너무 과도한 요구였다. 모스크바 전투는 공격이 아니라 방어전이었지만 군사적 무능한인 스탈린은 이런 현실을 몰랐다. 승리에 도취되어 눈이 뒤집힌 철권통치자가 결심한 이상 STAVKA(소련군 최고사령부)의 어느 누구도 그 오판을 뒤집을 수 없었다. 결국 격전으로 지쳐 있던 소련군은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다시 전장에 나가야 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이후 15개월 동안 동부전선의 중북부에 위치한 르제프(Rzhev) 일대가 제2차 대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지독했던 혈전의 무대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이 길고 잔인했던 전투는 마치 제1차 대전의 서부전선처럼 소련과 독일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정작 전선의 변동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너무나 치열했지만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1942년 지옥의 전장이 바로 르제프 전투(Battle of Rzhev)다.

겉으로만 유리해 보일 뿐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1942년 1월 당시의 전쟁 상황은 스탈린이 자신감을 회복할 만큼 소련에 유리해 보이기는 했다. 남부의 로스토프(Rostov)에서 처음으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두며 독일 남부집단군을 후퇴시켰고, 북부의 레닌그라드는 봉쇄된 상태였지만 라도가(Ladoga) 호수를 통한 보급로가 열리면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을 무엇보다도 고무시킨 것은 독일이 모든 전력을 집중해 공격한 모스크바를 지켜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전쟁 발발 후 6개월 동안 독일이 그랬듯이 이제부터는 소련이 독일군을 섬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탈린만 그렇게 낙관했을 뿐이었고 실제로 소련이 개전 후 4개월 동안 잃었던 지역을 되찾는 데만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련이 전선의 주도권을 회복한 줄로 착각한 스탈린은 모스크바의 안위를 공고히 하는 것을 넘어 독일군의 본격적인 격퇴를 꿈꾸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전투는 전략적으로 뛰어난 성과임에는 틀림없지만, 처음 언급한 것처럼 전술적으로 압승을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모스크바를 간신히 수호했을 뿐이었고 전투로 인한 소모가 독일군보다 많았던 소련군은 당장 재편에 들어가야 했다. 약 한 달 간 소련군은 100여 킬로미터를 진격해 독일군을 밀어냈지만, 소련의 대대적인 역공이 없다 해도 독일군이 제풀에 주저앉을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독일군 내부에서도 날씨와 보급 문제로 모스크바 공략을 포기하고 작전상 후퇴를 단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실제로 구데리안(Heinz Guderian)처럼 총통의 엄명을 어기고 퇴각을 단행한 일부 지휘관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로 인해 히틀러의 대대적인 군부 숙청이 이루어졌지만, 어쨌든 소련은 이러한 독일의 복잡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스탈린은 단지 어렵게 얻은 승리에 고무되어 있었을 뿐이다.

지칠 대로 지친 소련군의 공격이 마지못해 시작되었다

양측 지휘관들은 전선을 잠시 소강상태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히틀러와 스탈린은 용납하지 않았다. 다만 히틀러가 그때까지 후퇴한 것을 마지못해 인정한 대신 현지사수를 엄명한 반면, 스탈린은 너무 들뜬 나머지 중단 없는 공격을 명령했다는 점이 달랐다. 실질적으로 모스크바 전투를 승리로 이끈 서부전역(West Theater) 사령관 주코프(Georgy Zhukov)는 스탈린의 지시에 펄쩍 뛰었지만 한번 눈이 뒤집힌 독재자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내키지 않는다 해도 이왕 시작한 공격이라면 어쨌든 승리를 거두어야 했다. 북에서 남으로 차례대로 배치된 북서전선군(Northwestern Front), 칼리닌 전선군(Kalinin Front), 서부전선군(Western Front), 브리얀스크 전선군(Bryansk Front)으로 구성된 약 200만의 병력과 장비가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이들 서부전역 관할 부대들은 이번 공세를 위해 새롭게 준비된 자원이 아니라 지금까지 모스크바를 지켜내느라 지칠 대로 지친 전력이었다.

그나마 독일군의 부대 재편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전략적으로 소련이 공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위안이었다. 대강의 준비를 마친 소련은 모스크바 전투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인 1월 8일, 공세를 시작했다. 때문에 일부 자료에서는 모스크바 전투와 르제프 전투를 하나의 연장선상에 놓고 분석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이러한 구분은 후세가 내린 정의일 뿐, 전투가 계속되었던 당시에는 칼같이 나누어 분석하고 말고 할 여유조차 없었다.

선공은 칼리닌 전선군이 열었다. 이들은 볼가(Volga) 강을 건넌 후 시쵸프카(Sychyovka)를 거쳐 브야즈마까지 남진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서부전선군이 모스크바 전투 당시 탈환에 실패한 모자이스크(Mozhaysk)로 전진을 시작했다. 이들은 목표 지점을 거쳐 서쪽의 브야즈마까지 진격해 칼리닌 전선군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이들 좌우에 있던 북서전선군과 브리얀스크 전선군도 함께 공세를 시작해 돌파구 확대에 들어갔다.

소련군의 진격이 독일 제9군에 막히면서 르제프 돌출부가 형성되었다

모스크바 전투 종결 직후 설치된 쾨니히스베르크 방어선(Königsberg Line)까지 밀려나 있던 당시 독일군의 배치는 약간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약 150만의 제9군, 제4기갑군, 제3기갑군, 제4군이 마구 뒤섞여 있었는데, 이는 히틀러가 태풍작전을 실시할 당시 북부집단군 예하 일부 부대까지 모스크바 공략에 투입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야전군(Army)이라는 제대는 예하 부대의 예배속 변경이 빈번한 사령부 개념이지만 문제는 시점이었다.

독일은 밀려나느라 부대 간 방어 구역도 정확히 정립이 안 된 상태에서 소련의 연이은 공격을 받았다. 때문에 곳곳에 전초가 뚫리면서 소련군이 쇄도해 들어왔다. 아직 방어선 구축에 여념이 없던 독일군은 예상치 못한 소련군의 공세에 놀랐다. 아무리 히틀러가 사수를 엄명했어도 현실적으로 소련의 공세를 감당할 수 없었던 독일은 다시 밀려나갔다. 공격을 가한 소련도 지쳤지만 사실 독일이 더 피곤한 상황이었다.

독일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이 접한 지경선 사이로 돌파를 감행하여 벨리키예 루키(Velikiye Luki)와 비텝스크(Vitebsk) 근처까지 무려 100km를 남진하는 데 성공한 칼리닌 전선군의 활약은 인상적이었다. 또한 서부전선군도 1월 20일에 이르러 모자이스크를 탈환한 뒤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단지 이때까지만 놓고 본다면 스탈린의 판단이 옳았을 수도 있지만 곧바로 문제가 발생했다.

칼리닌 전선군과 서부전선군을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한 르제프를 향해 돌진하던 소련 제29, 31, 30군이 독일 제9군의 격렬한 저항에 막혀 공격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이었다. 이들은 좌우에 위치한 인접부대가 쾌속의 진격을 계속하는 와중에도 볼가 강을 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 전선의 모습이 이상하게 꼬여갔다. 이후 피의 학살장이 되어버린 유명한 르제프 돌출부(Rzhev Salient)가 이렇게 형성되었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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