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같은 전투의 막이 오르다

팔켄하인은 독일 측 방향으로 돌출된 베르됭의 삼면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빠른 시간 안에 외곽에 위치한 두오몽 요새, 보 요새를 비롯한 주요 거점들을 신속히 점령하기로 했다. 그러면 프랑스가 이곳을 탈환하려고 기를 쓸 것이 확실하므로 유리한 위치를 점한 상태에서 앞만 보고 달려들 프랑스군을 차례차례 쓸어버리면 될 거라 본 것이다. 팔켄하인은 이를 심판 작전(Unternehmen Gericht)으로 명명하였다.

작전은 원래 1916년 2월 12일에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강풍과 눈보라가 이어진 악천후로 말미암아 잠시 연기되었다.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베르됭 일대의 상황이 프랑스 정보망에 포착되자 위기를 직감한 총사령관 조프르(Joseph Joffre)는 급히 프랑스 제2군을 증강시키고 요새를 보강하도록 지시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독일의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는 전력 격차가 약 1대 4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2월 21일 아침 7시 14분, 약 10킬로미터 정도의 전선에 일렬로 촘촘히 도열한 1,200여 문의 대포들이 일제히 포격을 개시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끔찍했던 베르됭 전투의 지옥문이 열린 것이다. 포격은 약 6시간 정도 이어진 후 잠시 멈추었지만 프랑스군 진지를 살피고 돌아온 정찰대가 아직 일부에 프랑스군이 남아있다는 보고를 하자 지체 없이 재개되었다.

한마디로 포탄의 소나기로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킬 작정이었다. 베르됭이 망가질수록 일차 목표인 점령이 수월할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포격이 장장 9시간 이상 더 이어지면서 30만 발의 포탄이 일대를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는데, 부아 데 코르(Bois des Caures) 한 곳에만 무려 8만 발의 포탄이 떨어졌을 정도였다. 만일 이때 곧바로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이어졌다면 프랑스군을 쉽게 격퇴시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

예상 밖의 저항에 당황하는 독일

자신만만한 크노벨스도르프는 빌헬름 황태자에게 그날 중으로 대부분의 요새들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고, 포격을 과신한 독일군은 의외로 느긋한 모습을 보였다. 포격 종료 후 곧바로 뫼즈(Meuse) 강을 따라 남하해 부아 도몽(Bois d'Haumont) 요새를 점령한 제7예비군단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부대들이 소규모 전방 정찰만 시도했을 뿐이었다. 독일은 그렇게 천금 같은 시간을 놓쳤다.

이처럼 독일군의 후속 진격이 미미한 틈을 타서 엄청난 포격에도 살아남은 프랑스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저항에 나섰다. 특히 전쟁 전 하원의원이었던 드리앙(Émile Driant)이 지휘하는 2개 경기병(Chasseur) 대대가 방어에 나선 부아 데 코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처럼 너무 안이하게 공격에 나선 독일군은 예정 목표 중 단 한 군데만을 점령하는 데 그쳤다. 당황한 크노벨스도르프는 재차 포격을 실시한 후 제18군단에게 돌격을 명했다.

불리한 전황과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선을 고수하던 드리앙과 그의 부대는 이튿날 전멸하였고, 독일군은 간신히 첫날의 예정 목표선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전선 전체로 볼 때 가장 결정적인 진격 시기를 놓친 독일군의 전과는 그다지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상을 뛰어넘는 프랑스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독일군의 출혈도 컸다. 이처럼 작전 첫날부터 불길한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팔켄하인은 프랑스군의 피를 얻으려면 불가피하게 독일군의 희생도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첫날의 결과는 예상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손쉽게 프랑스군을 압살하려던 그의 생각과 달리 독일군의 엄청난 희생도 강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앞으로 1년 가까이 계속될 것이고 첫날 입은 피해가 오히려 적은 수준이라는 사실을 이때까지만 해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철군 대신 사수를 결정하다

독일은 두고두고 땅을 치고 후회할 만큼 개전 첫날의 결정적인 호기를 어이없게 날려 버렸지만 그래도 전략적 우세는 잡고 있던 상황이었다. 2월 24일이 되었을 때 베르됭 외곽에 형성된 프랑스군 방어선은 처참히 무너졌고 25일에는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두오몽 요새가 함락되었다. 이 소식은 후방의 프랑스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고 즉시 탈환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중부집단군 사령관 카리가 베르됭을 포기하고 철군하겠다고 하자 총사령관 조프르는 그를 해임하고 페탱(Henri Philippe Pétain)이 지휘하는 제2군을 뫼즈 강 좌안으로 이동시켜 방어를 책임지도록 조치했다. 사실 군사적으로는 전방의 주요 요새들이 함락된 이상 베르됭을 포기하고 좀 더 방어에 유리한 후방에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맞지만 명분 때문에 프랑스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곳을 사수하기로 하였다.

이는 팔켄하인의 의도대로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새로운 책임자로 부임한 인물이 페탱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나폴레옹 이래 프랑스군의 전술로 정립된 공격 제일주의에 상당히 비판적인 인물이었다. 무모한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무조건 전선을 사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는 팔켄하인이 쳐 놓은 덫으로 병사들을 몰아넣지 않았다. 당연히 그는 부하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오히려 페탱은 팔켄하인이 생각하던 방식으로 독일군을 격퇴시키기로 결심하였다. 당장 실지를 회복하는 것보다 독일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혀 스스로 공격을 단념하게 만들려는 생각이었다. 즉시 전선을 살펴 본 페탱은 초전의 패배가 프랑스군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병력과 장비가 현격한 열세였기 때문임을 확인했다. 그는 조프르의 전적인 지원을 받아 부대를 신속히 증원하고 포병을 집결시켰다.

보급을 받은 프랑스군이 강력한 저항을 시작하다

페텡은 소모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보급과 예비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베르됭으로 향하던 철길은 독일의 포격으로 차단된 상태였고 오로지 남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바르르뒤크(Bar-le-Duc)와 연결된 폭 7미터의 작은 소로만 남아 있었다. 곧바로 징발된 수천 대의 차량이 베르됭을 살리기 위해 이 작은 생명선을 통해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나르기 시작하였다. 이후 이 도로는 ‘성스러운 길(Voie Sacree)’로 불리게 되었다.

페탱은 이렇게 예비대가 확보되자 전선의 병사들을 순환 교대시켜 휴식을 취하도록 조치하였다. 반면 독일은 전투 초기부터 진격이 예상보다 더딘 바람에 보유 중인 예비대를 모두 소모한 상태여서 몹시 지쳐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군의 강력한 저항에 걸리자 다시 공세로 나서기가 매우 어려웠고 3월 말이 되었을 때 8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프랑스군의 피해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자 독일군 지휘부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오고 갔다. 예상외의 결과에 놀란 팔켄하인은 작전의 지속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심약했던 빌헬름 황태자는 한 술 더 떠 지금 당장 작전을 중지하자고 제안했다. 반면 호전적인데다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던 크노벨스도르프는 가장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던 제3군단장을 보다 공격적인 성향의 로호브(Ewald von Lochow)로 바꾸어 버렸을 만큼 더 강한 공세를 주장하였다.

결국 확전을 선택한 독일은 4월에 두 차례 공세를 재개했지만 모두 실패하였고 전선은 양측 병사들의 시신으로 넘쳐났다. 팔켄하인은 프랑스군의 피를 원했지만 독일군의 피도 그 못지않게 바쳐야 했다. 페탱이 프랑스군의 출혈을 극대화시키려는 독일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대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대응 방식을 프랑스군 내부에서 만장일치로 반긴 것은 아니었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