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처럼 시작되어 지옥으로 변해간 전쟁

1914년 8월 4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트라팔가 광장을 가득 메운 런던 시민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이처럼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열성적으로 반기던 장면은 비단 영국뿐 아니라 전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시류였다. 마치 월드컵 개막이라도 되는 양 열광하는 어이없는 광경은 한마디로 전쟁의 무서움을 망각한 미친 시대의 단면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부당함을 인식한 이들도 있었는데 영국의 메리(Mary of Teck) 대비도 그러한 인물 중 하나였다. 영국의 참전 명분은 독일이 영세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략했기 때문이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 사이에서 발발한 싸움으로 인해 영국과 독일이 전쟁을 벌여야 하는 현실이 그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바보 같은 이유 때문에?”라고 통탄하면서도 막상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신속히 승리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이처럼 각국이 서둘러 전쟁에 뛰어들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양면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던 독일은 불과 6주 만에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서부전선을 평정할 수 있다고 보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만에 교전 당사국들은 종전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고,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지나 1916년이 되어서도 전선은 교착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깊게 파인 참호 사이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교전으로 말미암아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싸움을 멈출 명분은 없었고 결국 전쟁의 향방을 가를 건곤일척의 도박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으로 벌어진 전투는 전쟁의 종결은커녕 지금까지 보지 못한 지옥을 현실에 등장시키면서 전선을 더욱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바로 제1차 대전의 모든 전투를 통틀어 최악으로 기록된 베르됭 전투(Battle of Verdun)다.

독일이 영국 대신 프랑스를 택한 이유

전쟁 초기에 어설픈 지휘와 임기응변적인 작전 변화로 승리의 기회를 날려버린 몰트케의 뒤를 이어 독일군 참모총장에 임명된 이는 냉정한 성격의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이었다. 군수 계통 전문가이기도 했던 그는 1914년 겨울 이후 서부전선의 정체가 공고해지자 공세를 지양(止揚)하고 수세적으로 임하였다. 독일이 양면전에 깊게 빠진 이상 무턱대고 한 곳으로 전력을 집중시키기는 곤란하다고 본 것이었다.

덕분에 서부전선에서 연합국의 지속적인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고 동부전선도 전략적 우세를 확보한 상태로 별 탈 없이 유지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1년을 넘기고 영국의 해상 봉쇄로 물자 부족을 겪게 되자 독일 국내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아무리 영토 밖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있다 해도 지리적으로 사방이 포위되고 해군력이 약한 독일이 점차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국면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팔켄하인은 서부전선에서 교착 상태를 풀 수 있는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전쟁 초기에 독일의 전략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가 영국의 예상치 못한 빠른 참전이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독일은 강화된 영불 연합군의 방어선에 막혀 진격이 둔화되었고 의도와 달리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따라서 그는 영국과 프랑스를 모두 상대하기 버거운 상황에서 어느 한쪽을 먼저 격파하기로 결심했다.

팔켄하인은 영국보다 프랑스를 우선적인 목표로 정했다. 프랑스는 자기 땅에서 벌어진 전쟁이므로 끝장을 볼 때까지 싸워야 하는 입장인 반면, 영국은 남의 땅에서 싸우는 중이므로 프랑스가 굴복하면 전쟁을 계속할 이유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즉, 프랑스를 굴복시키면 영국은 스스로 물러날 것으로 예상한 것이었다. 사실 영국도 참전 초기의 열정이 사라지고 서서히 염증을 느끼던 중이었다.

공격 목표로 베르됭을 지목하다

지난 1915년에 있었던 전투들을 거치며 참호가 깊게 파인 현 상황에서 전선의 돌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양측 모두 깨닫고 있었다. 독일은 고착된 전선을 뛰어넘어 파리를 점령하기 불가능한 상황에서 프랑스를 굴복시키려면 전혀 다른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팔켄하인은 점령이 아니라 프랑스의 전력을 완전히 고사시키는 소모전을 구상하였다. 즉 그가 원한 것은 영토가 아니라 프랑스군의 피였다.

프랑스군의 증원 부대가 끊임없이 투입될 만한 공간을 만든 후 지속적인 포격으로 몰살시켜 버리려는 전략이었다. 전선의 돌파가 아니라 프랑스군의 섬멸이 목표였고, 예상대로 프랑스군이 과다 출혈이 되면 자연스럽게 전선 전체가 허물어질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려면 우선 프랑스가 자존심 때문에라도 즉각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는 위치를 공격 목표로 선정해야 했다.

팔켄하인은 아라스(Arras)에서 랭스(Reims)에 이르는 전선 돌출부의 남측 외곽에 있는 베르됭(Verdun)을 주목하였다. 서부전선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이곳은 양측 모두의 전략적 목표물인 파리에서 상대적으로 멀다는 이유로 그동안 의미 있는 교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독일군의 주력이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에 따라 벨기에로 우회해서 그럴 뿐, 원래 베르됭은 역사에 수시로 등장할 만큼 양국을 최단으로 연결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해 있다.

인구 3만의 작은 도시지만 이처럼 전략적 중요성이 큰 곳에 위치하다 보니 베르됭은 두오몽(Douaumont) 요새, 보(Vaux) 요새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축성된 여러 방어물들과 진지에 의해 엄중히 보호받고 있었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했을 때도 가장 마지막까지 독일에 저항한 자존심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군사적으로 중요하고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큰 곳이라 독일의 공세가 개시된다면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나올 것이 틀림없었다.

미끼를 던지기 위한 준비를 하다

팔켄하인은 독일이 베르됭을 점령하면 프랑스가 이를 되찾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으로 보았고 이때 화력을 집중하여 몰려드는 프랑스군을 박멸할 계획이었다. 즉 도시는 점령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프랑스군을 유인할 미끼에 가까웠다. 그는 마치 제갈공명의 출사표처럼 자신의 굳은 의지를 담은 서한을 빌헬름 2세(Wilhelm II)에게 보냈고, 이를 본 카이저는 몹시 흡족해하며 선전을 당부했다.

독일은 일거에 베르됭을 점령하기 위해 독일 본토에 남아 있던 예비대는 물론 인근에 배치된 전력마저 차출했는데 핵심은 1,200여 문의 각종 야포였다. 당시 서부전선 중앙에 배치된 독일군은 약 100여만 명이었는데, 그중 14만여 명의 독일 제5군이 어마어마한 포병의 지원을 받아 베르됭 공략에 나설 예정이었다. 사령관은 빌헬름(Wilhelm) 황태자였지만 그는 연대급 부대도 지휘해 본 적이 없는 불과 34살의 애송이였다.

제5군의 실질적인 지휘권은 카이저의 총애를 받고 있던 참모장 크노벨스도르프(Schmidt von Knobelsdorf)가 쥐고 있었다. 하지만 선봉에서 공세에 먼저 투입될 9개 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예비대는 후방의 팔켄하인이 직접 통제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만으로 2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전쟁 초기에 지휘 체계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범했던 엄청난 실수를 독일은 여전히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맞선 프랑스 중부집단군은 카리(Langle de Cary)가 지휘하는 약 30만이었고 예하 제2군이 베르됭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다. 모든 부분이 열세였지만 특히 포병 전력의 격차가 심각했다. 당시 연합군 주력이 파리를 향해 툭 튀어나온 전선 북부의 돌출부 방어에 투입되어 있었기에 병력이 부족했던 프랑스 제2군은 베르됭 북쪽의 고지대에 설치된 여러 요새들에 의존하여 소극적인 방어를 펼치던 상황이었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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