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망상

이제 레닌그라드 점령의 꿈은 완전히 사라졌다. 아니 벼르고 벼른 쿠르스크 전투에서 먼저 수건을 던진 이후로 독일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세상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오로지 히틀러만이 현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밀려나고 있던 전선 중앙과 남부에 비해 북부집단군이 현 위치를 계속 고수하고 있다 보니 레닌그라드 점령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독일 북부집단군은 3배가 넘는 소련군을 상대로 놀랄 만큼 잘 싸우고 있었다. 사실 방어전이다 보니 전과가 잘 드러나지 못하였을 뿐이지 이 정도만으로도 주어진 역할 이상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주도권이 소련에게 넘어가고 다른 전선이 밀려나고 있는 이상 계속 제자리에 머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퀴흘러는 최악의 사태가 오기 전에 이제는 무의미해진 레닌그라드 점령의 미련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즈음 히틀러는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를 통해 현 전선에서 약 100여 킬로미터 후방인 나르바(Narva)와 노브고로드를 연결하는 선에 진지를 구축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곳까지 후퇴를 용인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만일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여전히 현지를 사수하고자 했다. 이렇게 축성이 시작된 진지와 참호는 그해 말 흑해 연안까지 2,000여 킬로미터가 연결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판터-보탄 선(Panther–Wotan line)이었다.

히틀러는 만일 독일이 밀리면 이 방어선을 거점으로 소련군을 무한정 소모시킬 생각이었다. 이기지 못하더라도 패하지는 않겠다는 의지였지만 진지를 깊게 파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였고 설령 방어선이 완벽하게 구축된다 해도 효과적일 수 없었다. 지금까지 독일은 수많은 요새와 방어선을 돌파하여 승리를 거두어 왔음에도 정작 이를 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전선이 다시 소강상태가 된 사이 소련은 다음 공세를 위한 전력을 꾸준히 증강하였다.

해방의 날

1944년 1월 14일, 모든 준비를 마친 소련군이 공격을 시작하였다. 볼호프 전선군과 제2발틱 전선군(북서전선군)이 서진을 시작함과 동시에 레닌그라드 전선군이 남쪽으로 밀고 나왔다. 반대편 북쪽에서 레닌그라드를 위협하던 핀란드군도 이제는 무시할 정도로 소련군은 자신감이 충만하였다. 결국 6일간의 치열한 공방 끝에 독일군은 므가(Mga)와 노브고로드를 포기하여야 했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현 위치를 사수하라고 난리를 쳤다.

하지만 제18군 사령관 린데만은 총통의 엄명을 어기고 루가 강까지 질서정연하게 부대를 후퇴시켰다. 이렇게 독일 북부집단군이 60~100킬로미터를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1월 27일, 마침내 포위망이 완전히 풀리면서 872일간 쉴 새 없이 이어진 대결은 소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마지막 전투에서도 독일군은 3만 6천 명의 손실을 보았던 반면 소련군에게는 28만여 명의 희생을 안긴 전술적 대승을 거두었다.

북부집단군은 위기를 모면하고 살아날 수 있었지만 이는 잠시 소련의 추격권을 벗어난 것뿐이었다. 퀴흘러는 린데만의 선택이 불가피하였음을 설명하고, 차라리 판터-보탄 방어선으로 북부집단군을 완전히 후퇴시켜 전략적 방어에 나서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대한 히틀러의 답변은 간단명료하였다. 지난 2년 동안 3배 이상의 소련군을 상대로 무난하게 전선을 유지시켜온 북부집단군 사령관 퀴흘러를 해임한 것이었다.

그의 후임으로 1월 29일, 서둘러 부임한 인물이 이른바 ‘히틀러의 소방수’라 불리던 모델(Walter Model)이었다. 독일군 내에서 방어전의 귀재로 손꼽혔지만 그가 당장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격전 끝에 2월 12일, 소련군이 루가를 탈환하고 독일군을 루가 강 서편으로 밀어붙이자 모델은 2월 17일, 북부집단군을 판터-보탄 선으로 후퇴시켰다. 이제 레닌그라드를 둘러싼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가장 피해가 컸던 전투

레닌그라드와 그 주변에서 벌어진 격전들의 규모가 워낙 컸고 전후로도 계속 싸움이 이어졌기 때문에 보는 시각에 따라 전투 기간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독일이 육상 통로를 차단한 1941년 9월 초부터 소련이 포위망을 완전히 해제시킨 1944년 1월 말까지의 기간을 레닌그라드 전투로 정의하는 데 크게 이론의 여지는 없다.

제2차 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이 정면으로 격돌한 동부전선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었다. 전쟁 내내 양측 합쳐 1,000만이 넘는 엄청난 병력이 동서남북 최대 2,000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공간에서 4년간 쉼 없이 싸움을 벌였기에 당연히 규모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독소전쟁은 엄청난 대군이 거대한 공간을 폭풍처럼 가로지르며 싸운 상당히 동적인 전쟁이기도 했다.

이에 비한다면 레닌그라드 전투는 마치 제1차 대전 당시의 서부전선처럼 지도상의 모습으로는 상당히 정적이었다. 독일의 폭풍 같았던 초기 공세가 멈추면서 전선은 양측이 깊게 파놓은 요새 같은 방어선으로 바뀌었고 결국 양측 모두 이를 뛰어넘지 못해 30개월 가까이 제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간이 길다 보니 당연히 싸움은 치열하였고 그 피해도 독소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였다.

대부분의 전투 기간 동안 공세를 가하는 입장이었던 독일군은 55만여 명의 병력이 전사상 당하거나 실종되었다. 반면 최종적으로 독일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거머쥔 소련의 피해는 경악할 만한 수준이었다. 이 도시를 지키고 침략자를 몰아내기 위해 무려 350여만 명의 군인이 죽거나 다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최소 50여만에서 최대 100여만으로 추산되는 소련 민간인의 희생은 제외한 숫자다.

상상을 초월했던 민간인 희생

전쟁이 원래 무서운 것이지만 독소전쟁은 편집증적인 나치의 이데올로기와 이에 못지않은 볼셰비키의 잔혹함이 더해지면서 인류 역사에 손꼽히는 최악의 전쟁이 되었다. 교전으로 인한 사상은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지만 독소전쟁은 비전투원들에 대한 학살이나 학대가 일상적이었다. 특히 최소한의 인도적 구호 조치도 배제한 채 도시 전체를 말려버리려 하였기에 민간인의 희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전쟁 중 민간인의 피해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레닌그라드에서 희생된 이들 대부분은 1941년 겨울에 굶거나 얼어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결연한 의지로 질서를 유지시킨 주다노프를 비롯해 레닌그라드 일대에서 활약한 전쟁 지도부가 1950년대에 숙청되긴 했지만, 스탈린이 종전 직후에 전쟁을 승리로 이끈 5대 영웅 도시로 레닌그라드를 즉각 선정하였을 만큼 시민들의 노력과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단지 군사적 측면으로만 놓고 본다면 히틀러의 오락가락한 결정 때문에 초기에 도시 점령을 이루지 못한 채 전략적으로 결국 패하였지만 독일 북부집단군은 상당히 선전했다. 판터-보탄 선으로 후퇴한 시점까지 전선을 끄떡 없이 유지하면서 무려 7배가 넘는 소련군의 출혈을 강요한 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겉으로는 독일이 포위한 모양새였지만, 사실 레닌그라드 전투는 소련의 돌파를 수세적 입장에서 성공적으로 저지한 전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양측 모두에게 가해진 어마어마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레닌그라드를 둘러싼 포위망이 무너지고 독일의 패전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1944년 3월에도 여전히 1,500킬로미터 가까이 되는 거대한 전선이 소련 영토 내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때는 언제 끝날지 몰랐지만 전쟁은 앞으로도 1년을 더 끌어야 했고 당연히 그만큼의 희생과 파괴가 요구되었다. 한마디로 독소전쟁은 인류사의 엄청난 비극이었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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