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은 오로지 인간만이 다루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음식을 불에 익히면서 다양한 먹거리를 쉽고 안전하게 섭취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다른 동물에 비해 털과 피부가 빈약함에도 난방을 하면서 추운 곳에서 살 수 있었고, 어둠을 극복하면서 활동할 수 있는 시간도 연장되었다. 또한 불은 인간이 사나운 동물들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처럼 불을 다룰 줄 알게 되면서 인간의 삶은 풍요로워졌다.

그런데 편리함의 이면에는 화재처럼 엄청난 피해를 입히는 부작용도 있었다. 이렇듯 도구가 상반된 효과를 가지고 있다면 나쁜 점을 억제하고 좋은 점만 취하려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지구상에 등장한 이후 한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인간은 나쁜 점에서도 이익을 취하려 했다. 어쩌면 불을 무기로 사용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화공(火攻)은 오래된 공격법이다. 언제부터 불을 싸움의 도구로 활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용할 줄 알게 된 직후부터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불로 상대의 장비나 거주지를 태워버리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지만 불씨의 획득과 보관, 그리고 화력의 제어가 쉽지 않았다.

한번 타오른 불길을 진압하기란 쉽지 않지만 불을 꺼버리면 화공의 효과는 사라진다. 그래서 화공의 등장과 함께 다양한 방어법도 등장했다. 따라서 불을 무기로 사용하려면 화력을 필요한 곳에 집중하고 상대가 쉽게 끌 수 없도록 제어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비잔틴 제국(동로마, 이하 비잔틴)의 필살기로 알려지는 ‘그리스의 불(Greek Fire)’은 바로 이런 목적에 가장 부합되는 화공 무기라 할 수 있다. 화약 이전에 등장한 대표적 화기인 그리스의 불은 현재 그 제조 방법이 전해지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비밀로 취급되던 당대의 전략 무기였다.

생각보다 오래된 화공의 역사

비잔틴의 작가이자 사학자인 테오파네스(Theophanes)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헬리오폴리스(현재 레바논의 바알베크)가 사라센(Saracen)¹⁾에게 점령당했을 때, 박해를 피해 비잔틴으로 망명한 과학자 칼리니쿠스(Callinicus)가 672년에 그리스의 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그가 최초의 제작자라기보다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온 무기라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인간은 이미 오래전에 불이 잘 붙고 쉽게 꺼지지 않아 위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재료들을 발견했고 당연히 이를 무기로 활용하였다. 기원전 850년경 아시리아인들이 유황과 기름, 역청을 혼합한 나프타²⁾에 불을 붙여 화공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술이 그리스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그리스의 불과 관련된 기술은 칼리니쿠스로부터 따져도 최소한 1,5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424년 아테네와 보이오티아(Boeotia)가 벌인 델리움(Delium) 전투에서 열세에 몰린 보이오티아군이 화공 도구를 이용해 압도적이던 아테네군을 물리쳤다.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인화 물질에 불을 붙여 상대를 공격했는지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지만 그리스 사학자인 투키디데스(Thucydides)는 “거대한 불길을 상대편에 날려 보냈다”며 이미 그리스의 불과 유사한 방식의 무기를 사용했던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원정, 로마의 전쟁 중에도 나프타를 이용한 무기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종종 등장한다. 로마는 오늘날의 화염병처럼 항아리에 나프타를 담아 불을 붙인 후 투척기를 이용해 적에게 날려 보내는 방식을 썼다. 적어도 알려진 기록에 의하면 이때까지는 불이 붙은 인화 물질을 투척기나 쇠뇌 혹은 화살 같은 수단으로 적을 향해 발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스의 불은 사라센의 공격을 막아낸 결정적 병기였다

하지만 사용 방법에서 그리스의 불은 이들과 차원이 달랐다. 앞의 언급처럼 그전부터 존재했던 무기라고 추정은 되지만 전쟁사에 그리스의 불이 명성을 남긴 때는 비잔틴 시절이다. 7세기 중반 중동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일어난 새로운 슈퍼 파워가 흔히 사라센으로 통칭되는 이슬람 세력이었다. 힘을 키운 이들이 동방의 보고인 콘스탄티노플을 노린 것은 당연했고, 그때부터 11세기 중반까지 비잔틴과 사라센 사이에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다.

맹공을 펼치던 사라센을 물리친 결정적인 병기가 바로 그리스의 불이었다. 화력과 점성이 보다 강화된 나프타에 불을 붙여서 뿌리는 방식으로 공격을 가했는데, 전해지는 자료나 그림으로 추정해 볼 때 수동식 펌프를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불이 붙은 나프타는 물속에서도 계속 타올랐을 만큼 인화력이 대단했다. 모래로 덮는 방법 외에는 불길을 잡을 수 없어 공격하는 비잔틴 병사들도 사용할 때 상당히 조심해야 했다.

따라서 육지보다 아군의 위험이 덜한 해전에서 많이 사용했고 그리스의 불로 공격당한 적함은 침몰할 때까지 타올랐다. 사라센이 이 무기에 대한 대책을 찾기 위해 고심했지만 결국 해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리스의 불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천사에게서 제조법을 전해 받았다”고 미화되었을 만큼 역대 황제들에 의해 제조 방법이 직접 통제되어 온 비잔틴의 일급 전략 무기였다.

비잔틴이 멸망한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전투에 원군으로 온 이탈리아 병사들에게 이를 지급했지만 끝까지 제조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 정도였다. 오래 타고 쉽게 꺼지지 않는 물질들은 그런대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엄밀히 말해 이 무기의 비밀은 나프타 제조법보다 오늘날의 화염방사기처럼 화염을 멀리 분사하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현재 이에 대한 것은 전하지 않고 다만 비슷한 도구에 관한 자료가 중국 사료에 등장한다.

중국에도 유사한 무기인 맹화유궤가 있었다

연관성은 알 수 없지만 그리스의 불과 비슷한 무기가 중국에도 있었다. 반고(班固)가 집필한 전한서(前漢書)에는 한나라가 석유를 이용해 화공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6세기 남북조 시대에 북주에서 적의 공성병기를 기름으로 태워버렸다는 사례가 있지만 이것이 나프타와 같은 물질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10세기 오대십국 시대에 맹화유(猛火油)를 이용해 수상전이나 공성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맹화유가 서양의 나프타와 같은 물질로 추정된다. 당시 맹화유는 베트남 남부에서 수입했지만 10세기 송나라 시대에 들어오면서 중국에서도 채굴이 이루어졌다. 이를 이용한 맹화유궤(猛火油櫃)는 맹화유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무기로 제작과 사용 방법이 무경총요(武經總要)라는 책자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판단하면 맹화유궤와 그리스의 불은 상당히 유사한 무기라고 볼 수 있다.

수백 년간 이어진 매서운 공격을 끄떡없이 막아낸 비잔틴의 비밀 병기 그리스의 불은 사라센을 고심에 빠뜨렸다. 막는 방법도 방법이거니와 이쪽엔 없는 것을 상대방만 가지고 있다는 엄청난 자괴감에 적어도 유사한 무기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라센에도 나프타를 이용한 무기가 등장한 것은 역사의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할 수 있었다.

제1차 십자군전쟁을 일으킨 유럽의 기독교 연합군은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해 이교도를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한 후, 서유럽식 봉건 국가인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명분은 성지 회복이었지만 철저히 정치적, 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인 침략 전쟁이었다. 이런 잔인한 도발은 필연적으로 이슬람 세계의 반격을 불러왔다. 이집트의 술탄이던 살라딘은 1187년 예루살렘 왕국을 함락시켰다.

그리스의 불은 화약의 등장으로 사라졌지만 화공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바로 이때 비잔틴 출신의 기술자를 생포하면서 재료와 혼합 비율이 비밀이었던 나프타 제조법이 이집트로 전해지게 되었다. 비록 나프타를 방사하는 장비에 대한 기술까지 입수하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확보한 노하우로 투척용 화공 무기를 생산해 활용했다. 재미있게도 이집트 또한 비잔틴 못지않게 국가 기밀로 유지하는 바람에 이 또한 그리스의 불처럼 현재 제조 방법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리스의 불로 인해 가장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이 무기를 비잔틴과 자신들만 보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현재 일부 국가들 외에 개발이나 보유가 어려운 핵무기처럼 이런 행태는 무기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흔한 사례다. 하지만 나프타를 이용한 화기의 제작 노하우가 현재 전해지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시점부터 사용하기 편리하고 화력도 더 강한 화약이 본격적인 무기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최신 디스플레이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사라진 브라운관을 예로 들면 이제는 고장난 브라운관을 수리할 기술자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다. 공개된 기술도 이럴 정도인데, 비밀리에 취급된 경우라면 더 빨리 기억 속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사실 그리스의 불은 보다 강한 무기가 등장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이지만 너무 비밀리에 취급되다 보니 지금까지도 신비롭게 여겨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전투 기법 중에서 화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오히려 강력해졌다. 19세기 말 탄생해 제1차 대전부터 본격 사용된 화염방사기는 사실 편리하고 강력하게 진화된 그리스의 불이라 할 수 있고, 백린탄이나 네이팜탄 같은 소이탄은 가장 잔혹한 재래식 무기로 손꼽힐 정도다. 핵폭탄은 거대한 열 폭풍으로 모든 것을 순식간에 태워버리는 최악의 화공 무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불은 인류에게 여전히 공포스런 존재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주석

1) 유럽인들이 이슬람 교도를 부르던 말

2) 고대 페르시아에서 발견된 휘발성의 액체연료를 그리스어로 ‘나프타’라 불렀으며 이것이 오늘날 조제(粗製) 휘발유의 명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