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열린 통로

지금까지 소련의 레닌그라드 포위망 돌파가 난항을 겪은 데는 외곽의 볼호프 전선군과 내부의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협공이 구조적으로 곤란했던 점도 있었다. 독일군과 일종의 자연스런 경계선이 되어 버린 네바 강 하구를 레닌그라드 전선군이 건너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처럼 네바 강은 독일의 공격으로부터 레닌그라드를 수호한 주요 방어선임과 동시에 소련의 반격으로부터 독일을 지켜낸 장벽이기도 했다.

소련은 네바 강이 전차의 도하가 가능할 정도로 단단히 결빙되기를 기다리면서 협공을 가할 시냐비노 회랑 양측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 주코프가 볼호프 전선군 사령부까지 직접 나와서 지켜보는 가운데 1943년 1월 12일, 대대적인 포격으로 공세를 시작하였다. 선봉은 또 다시 재건된 제2충격군이었고 반대편 레닌그라드 전선군에서는 이번 작전을 위해 새로 편성된 제67군이 돌격을 개시하였다.

최초 포격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이번에도 독일군은 물러서지 않고 저항하였다. 방어물에 걸려 소련군이 주춤하는 사이에 독일 제18군 사령관 린데만(Georg Lindemann)이 긴급 편성한 기갑부대로 기동방어전을 펼치며 여기저기 뚫리기 시작한 구멍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충분히 전력을 구축한 소련은 예비대를 즉시 투입하여 독일을 몰아붙였고 마침내 1월 18일, 요충지 실리셀부르크를 되찾았다.

1월 30일이 되어 시냐비노 고지를 제외한 라도가 호수 남단을 소련군이 탈환하며 전투는 막을 내렸다. 동시에 미리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공병대가 라도가 호 남단에 10여 킬로미터의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불과 2주 만에 완성시켰다. 비록 시냐비노 고지를 여전히 점령하고 있는 독일군으로부터 포격을 받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지만 마침내 레닌그라드를 향한 육상 통로가 열린 것이었다.

여전히 강한 상대

이처럼 소련의 공세는 전략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단지 전투 결과만 놓고 본다면 상당히 우려할 만한 수준이었다. 독일이 12,000여 명의 병력과 50대의 전차를 잃은 반면 소련은 약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인명 손실과 함께 500여 대의 전차가 격파당한 것이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벌어졌던 통상적인 모습이기도 했는데, 그만큼 독일의 전투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1943년 1월에 동부전선의 남쪽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이 독일 제6군의 항복을 받고 그 반대편 북쪽 레닌그라드에서 포위망의 일각을 뚫어버리자 스탈린의 만용이 되살아났다. 이번 기회에 레닌그라드의 완전한 해방은 물론 독일 북부집단군을 일거에 섬멸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이런 스탈린의 구상에 이번에는 주코프도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신속히 준비를 완료한 소련군은 2월 8일 공세를 시작하였다.

볼호프 전선군과 레닌그라드 전선군이 협공을 통해 시냐비노 일대의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내면, 남쪽에 있던 북서전선군이 루가로 진격하여 독일 북부집단군의 퇴로를 차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달 간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였고 4월 2일에 소련군은 15만의 인명 손실을 입은 채 공세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전선의 주도권을 소련이 완전히 장악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처럼 생각보다 많은 피해가 이어지자 주코프는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육상 교통로가 뚫린 이상 너무 서두르다 더 큰 희생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전선 중앙의 쿠르스크(Kursk) 일대에 위기가 고조되면서 소련도 이곳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당장 독일 북부집단군의 섬멸이 불가능하다면 이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현 위치에 붙잡아두는 것도 전략적으로 괜찮다고 본 것이다.

고착된 전선

사실 당시 독일 북부집단군은 프스코프(Pskov), 혹은 좀 더 과감히 라트비아(Latvia)까지 후퇴하여 전선을 200여 킬로미터 이상 단축하고 전력을 재배치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옳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현지사수 엄명 때문에 계속 제자리에 머물러 소련군을 막아내야 했다. 이처럼 소련이 레닌그라드를 미끼 삼아 북부집단군을 잡아 놓고 여기에 히틀러의 쓸데없는 고집이 맞물려 전선은 급속도로 소강상태가 되었다.

6월이 되면서부터 레닌그라드 도심은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갔고 파괴된 도심의 복구가 본격 시작되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평온함과 달리 다음 격전을 위한 양측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독일 북부집단군 사령관 퀴흘러와 소련 볼호프 전선군 사령관 메레츠코프는 지난 1942년 이래로 계속 같은 곳에서 보직 이동 없이 맞상대하여 왔는데, 이는 독소전쟁 전체를 통틀어서도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따라서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퀴흘러에게 지난 봄에 있었던 패배는 자존심 문제여서 실리셀부르크를 재점령한 후 레닌그라드로 진격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는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에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증원과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즉시 동의할 것 같았던 히틀러가 정작 쿠르스크 전투 준비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느덧 히틀러에게도 레닌그라드는 뇌리에서 멀어진 문제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퀴흘러에게 쿠르스크 전투가 끝나면 전력을 지원하여 주겠다고 언질을 주었지만 이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자 모든 것이 없었던 이야기가 되었다. 오히려 그토록 지원을 기다리고 있던 7월 22일, 공세 준비를 마친 소련이 넉 달 동안의 정적을 끝내고 시냐비노를 향해 선공을 가해 왔다. 위치의 우위를 점하고 있던 독일이 한 달 동안의 격전 끝에 고지를 사수하였고 소련은 8만 명의 인명 피해를 보았지만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흘린 피

그동안 설령 승리를 하더라도 엄청난 피해를 보는 것이 다반사가 되어버린 소련에서 이 정도의 손실은 공세를 중단할 이유가 되지 못하였다. 곧바로 전력을 복구한 메레츠코프는 다음 공격을 개시하였다. 독일이 독소전쟁 내내 가장 힘들어 했던 부분이 바로 소련군의 복원 능력이었다. 아무리 격파하고 때려 부숴도 더 많고 강해진 모습으로 홀연히 나타나는 소련군에 독일군은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내막을 살펴보면 일선의 소련군 지휘관들도 고충이 많았다. 사실 전투를 치름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피해는 불가피하지만 그렇다고 무수한 피해를 쉽게 용인하는 지휘관은 없다. 메레츠코프나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고포로프(Leonid Govorov)를 비롯한 현지 지휘관 대부분은 전력의 우위가 충분히 담보된 상태에서 작전을 펼치고 싶어 하였지만 상부에서 너무 조급하게 굴고 있었다.

전쟁 초반기에는 스탈린이, 중반기 이후에는 STAVKA(소련군 최고사령부)가 당장 성과를 내라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돌격을 지시하고는 했다. 문제는 이렇게 참담한 경험을 했다면 다음에는 다른 방법을 택했어야 하건만 오히려 더욱 조급하게 일선 지휘관들을 닦달하였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대숙청 시대를 경험하였기에 무조건적인 상명하복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어이없지만 또다시 같은 방식으로 궤멸되고는 하는 것이 다반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9월 15일, 마침내 소련군은 철통 같았던 시냐비노 고지를 점령했다. 엄밀히 말해 도심으로 향하는 철도가 독일군의 공격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난 시점에서 레닌그라드의 해방은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되었다. 지도 위에 그어진 전선의 모습으로는 여전히 레닌그라드가 위협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 독일에게는 후퇴냐 현지 사수냐의 갈림길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