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켜버린 지휘권

히틀러는 만슈타인이 겉으로는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자신을 냉소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슈타인이 평소에 육군 총사령관이나 참모총장처럼 전쟁을 전략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보직을 원하였고, 충분히 그런 능력을 지닌 인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음에도 등용을 꺼렸다. 오히려 히틀러는 모스크바 공략 실패의 책임을 물어 브라우히치를 해임하고 자신이 직접 육군 총사령관에 오른 상태였다.

그래도 실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주로 군권과 거리가 먼 일선의 야전 지휘관으로 활용하였다. 전쟁 초기 제56장갑군단을 이끌고 북쪽의 레닌그라드로 가장 빨리 진격했던 그를 히틀러는 제11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가장 남쪽의 크림 반도를 점령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무려 8개월간 독일의 맹공을 버텨 온 세바스토폴을 점령하고 크림 반도를 평정한 그를 다시 레닌그라드로 보냈다.

히틀러는 북부집단군 사령관 퀴흘러에게 증원군을 보내 줄 테니 9월 중으로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하지만 명령을 받은 만슈타인이 제11군 일부를 이끌고 무려 1,800여 킬로미터를 이동하여 레닌그라드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9월 초였고, 현실적으로 지난 1년간 버텨오면서 철옹성이 된 도시를 한 달 안에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지휘 체계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엄연히 북부집단군의 사령관은 퀴흘러였지만 히틀러로부터 별도의 임무를 부여받은, 같은 원수 계급의 만슈타인을 통제하기는 애매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항상 병력 부족으로 곤란을 겪었던 북부집단군에게 증원은 천군만마였지만 이런 묘한 체계는 결코 원하지 않는 상황이었고 바람직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육군 총사령관에 오른 히틀러가 모든 전선을 직접 관리하려 들면서 야전 지휘관들의 권한과 체계도 이처럼 엉망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격전의 무대가 되어버린 회랑

그러는 사이 참패를 겪은 소련은 새로운 공세를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들의 시야에 볼호프 전선군과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이에 있는 시냐비노(Sinyavino)가 들어 왔는데, 사실 이곳은 소련군이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지난 12월 소련이 티흐빈을 탈환하면서 시냐비노를 사이에 두고 레닌그라드가 불과 20여 킬로미터 정도로 가까워진 상태였다. 즉, 이곳을 탈환하면 레닌그라드를 둘러싼 봉쇄는 자연스럽게 풀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시냐비노는 양쪽 측면이 소련군 쪽으로 길게 노출된 회랑이었지만 네바 강에 인접한 고지대라서 독일군은 소수의 병력으로도 소련군을 견제할 수 있었다. 더구나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일대에서 1942년 1월 초에 처음으로 전략적 반격을 실시하였을 뿐이고 그마저도 참담한 실패로 끝난 상황이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포병을 동원하여 회랑 양측에서 포격을 하는 방법으로 독일군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소극적 전술만 구사하고 있었다.

독일 제11군이 이동 중임을 파악한 STAVKA(소련군 최고사령부)는 볼호프 전선군 사령관 메레츠코프에게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시냐비노를 탈환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8월 19일 공세가 개시되었고 선봉은 지난 류반 전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뒤 다시 재건된 제2충격군이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제2충격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돌진하였지만 늪지대에 막혀 지지부진하였고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숲 속 통로에는 독일군이 지뢰를 촘촘히 매설한 상태였다.

독일이 레닌그라드로 진격하기 전에 소련이 먼저 공세로 나서자 당황한 히틀러는 만슈타인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시냐비노를 사수할 것을 지시하였다. 만슈타인은 포위 섬멸전을 구상하였지만 아직 제11군의 전력이 집결되지 않은 상태라 소련군을 안쪽으로 좀 더 끌어들이면서 시간을 확보하고자 했다. 하지만 총통의 채근이 계속되자 9월 10일, 어떨 수 없이 소수의 전력으로 제한적인 반격을 실시하였지만 우려했던 대로 실패로 막을 내렸다.

다시 좌절된 공격

히틀러가 의기소침해지자 오히려 만슈타인은 자신의 의도대로 작전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전력 집결이 완료된 9월 20일, 독일은 대대적으로 반격에 나서 소련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대부분을 포위하는 데 성공하였다. 소련으로서는 너무 한심한 상황이었지만 새롭게 재건된 제2충격군은 불과 6개월 만에 또 다시 포위되는 처지에 놓였다. 결국 10월 10일, 전투가 종결되었을 때 작전에 투입된 소련군의 절반 정도인 12만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독일은 시냐비노 일대의 위험을 제거하였지만 그 대신 레닌그라드 공략을 무기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독일군도 한 개 군단 정도인 26,000여 명의 손실을 입었는데, 소련에 비해 극히 적은 숫자라 해도 보충 능력이 현저히 뒤졌던 독일에게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결론적으로 시냐비노 전투는 비록 소련의 참패였지만 공세적 방어로 레닌그라드를 살려낸 셈이 되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가 살아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던 히틀러가 그 즈음부터 남쪽 반대편에 있는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에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히틀러는 소련의 보물 창고인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를 전쟁 전부터 가장 우선시해왔다. 모스크바 공략이 실패로 막을 내린 후 모든 관심을 이곳으로 돌렸고 반 년 동안의 준비 끝에 6월 28일, 청색 작전(Operation Blue)으로 명명한 대대적인 공세를 재개하였다.

이 계획의 목표는 B집단군이 볼가(Volga) 강 일대를 견제하여 통로를 확보하면 A집단군이 코카서스를 석권하는 것이었다. 또 다시 독일이 모스크바를 공략할 것이라 예상하고 준비했던 소련은 허를 찔렸고 독일은 전쟁 초기에 보여준 쾌속의 진군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돈(Don) 강과 볼가 강 만곡부 사이에 있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심상찮은 조짐이 보였다. 소련이 예상을 벗어난 극렬한 저항을 펼치면서 도시가 거대한 피의 블랙홀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살아나는 희망

이처럼 전선 남부의 스탈린그라드 일대가 엄청나게 불타오르면서 독일과 소련의 모든 시선이 이곳으로만 몰렸다. 반면 싸움이 멎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선의 다른 곳은 급속도로 소강상태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레닌그라드도 마찬가지였다. 11월 23일, 스탈린그라드에서 격전을 펼치던 30여만의 독일 제6군이 포위당하자 이들을 구하기 위해 만슈타인과 제11군이 다시 남부로 소환되면서 레닌그라드 점령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레닌그라드 일대에서 쉼 없이 격전이 벌어지던 1942년도 막을 내렸다. 여전히 레닌그라드는 포위된 상태였고 이를 뚫기 위한 소련군의 시도는 계속 좌절되었으므로 전략적으로 독일이 우세를 유지한 상황이었지만 단지 겉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지도 위에 그어진 전선은 그다지 차이가 없었음에도 수백만이 기아와 추위에 죽음의 위협을 느꼈던 1년 전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1942년 내내 라도가 호의 수송망을 통해 끊임없이 보급품이 흘러 들어간 반면 60여 만의 시민들과 부상병들이 무사히 도시를 빠져 나왔다. 그러는 동안 도시 전면의 방어선은 한층 더 강화되고 단단해져서 독일의 어지간한 작전에도 통과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12월이 되어 라도가 호수가 단단히 얼어붙으면서 다시 열린 ‘생명의 길’을 통해 더욱 많은 지원이 이루어지자 레닌그라드는 말로만 봉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간신히 증강된 제11군 일부마저도 불과 두 달 만에 다시 다른 전선으로 떠나보낸 독일 북부집단군은 공세로 나설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엄청난 격전들이 전선 남부에서 이어지다 보니 이곳에 대한 히틀러의 관심도 서서히 멀어져 갔다. 반면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역사적인 대승이 확실시되자 이제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왔다고 판단한 소련은 여세를 몰아 네바 강이 동결되는 1943년 1월에 레닌그라드를 해방하겠다고 결심했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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