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분노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한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12월 들어 최저 영하 40도까지 떨어진 1941년 겨울은 그야말로 결정적이었다. 이러한 혹독한 조건에서 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혹한은 가장 중요했던 시기에 독일의 진격을 막았고 이때 멈춘 독일의 파도는 그 사이에 더욱 강화된 소련의 단단한 방파제 때문에 이후 다시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실 추위가 낯설지 않은 소련인들에게도 혹한이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들은 추위를 대비하고 이겨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독일의 장비는 러시아의 추위에 얼어붙어 작동되지 않았지만 구닥다리로 폄하되던 소련의 무기는 이미 그런 조건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도록 제작되었기에 무난하게 움직였다. 결국 일선의 독일 지휘관들은 더 이상 작전을 펼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오로지 히틀러 혼자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2월 5일 모스크바 전면에서 시작된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독일군이 개전 후 처음으로 밀리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지금까지 독일의 승리를 이끌어 온 장군들을 해임하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Walther von Brauchitsch)를 위시하여 자신의 엄명을 어기고 부대를 후퇴시킨 많은 장군들의 군복을 줄줄이 벗겼다.

그에 비한다면 레닌그라드를 포위망으로 꽁꽁 감싸고 있던 북부집단군은 여전히 제 역할을 다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일말의 자비도 없이 고사시킬 것이라던 히틀러의 호언장담과 달리 여전히 저항이 계속되자 이 또한 불만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도시 진입을 유보시킨 인물이 정작 자신이었으면서도 함락이 이뤄지지 않자 그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스탈린의 반격

반면 계속된 패배로 의기소침해 있던 스탈린은 해가 바뀌어 1942년이 되면서 기가 살아났다. 모스크바를 위협하던 독일 중부집단군을 밀어낸 데 이어, 멀리 아조프(Azov) 해 연안에서도 독일 남부집단군을 격퇴하고 로스토프를 탈환하였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최초의 전략적 승리에 도취되어 주코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공세를 주장하였고 레닌그라드의 위기도 해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구체적으로는 노브고로드에서 류반(Lyuban)까지 진격하여 독일의 포위망을 분쇄하고 레닌그라드를 해방하라는 것이었다. 볼호프 전선군 사령관 메레츠코프는 스탈린의 욕심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수감 당해 노역을 했던 강제수용소 굴락(Gulag)의 트라우마가 너무 컸기에 감히 의견을 드러내지 못하고 1942년 1월 7일 공격을 단행했다. 하지만 강력한 독일군의 저항에 막혀 돌파가 지지부진하다가 1월 16일 볼호프 강 남단까지 진출하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위기를 느낀 북부집단군 사령관 레프는 후퇴를 요청하였지만 히틀러의 고집은 변함이 없었다. 원래부터 나치와 히틀러에 대한 반감이 컸던 그는 몹시 실망하여 직접 해임을 요청하고 1월 16일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후임으로 예하 제18군 사령관 퀴흘러(Georg von Küchler)가 부임했다. 이제부터 싸움은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돌파구를 확대하려는 메레츠코프와 히틀러의 현지 사수 엄명을 받은 퀴흘러의 대결로 바뀌었다.

그런데 지난 9월 이후로 전선이 정체되어 있던 레닌그라드 일대는 동부전선의 여타 지역처럼 폭풍 같은 진격과 대포위 섬멸이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제1차 대전 당시의 서부전선처럼 이미 양측은 참호를 깊게 파놓은 상황이었고 수많은 습지와 호수로 인해 한정된 지역에서 공격과 방어가 쉴 새 없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예비대의 투입 능력이 앞섰던 소련군이 조금씩 돌파구를 확장해 가고 있었다.

1942년의 시작

레닌그라드를 구하려는 소련의 열망은 컸지만 군사적으로 택할 수 있는 전략은 단순하였다. 기존의 북부전선군이 개편되어 탄생한 레닌그라드 전선군(Leningrad Front)이 도시를 방어하는 동안 볼호프 전선군이 밖에서 포위망을 뚫고 도시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단지 지도상으로 그어진 전선만 놓고 볼 때 두 전선군이 협공을 펼치면 독일 북부집단군을 역포위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레닌그라드 전선군이 공세로 전환하려면 독일의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 있을 만큼의 전력 증강이 선행되어야 했지만 중화기나 중장비의 전개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더불어 도시 북쪽에 진을 치고 있는 핀란드군도 견제하여야 했다. 그들은 독일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도시로의 진입을 멈춘 채 봉쇄만 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언제 어떻게 상황이 바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이 상태에서는 핀란드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메레츠코프는 추두보(Chuduvo) 서측에 위치한 독일 제1군단의 방어선 일각이 무너지자 이곳을 통해 돌파구를 확장하려고 예하 부대 중 가장 전력이 강한 제2충격군(Shock Army)을 투입하였다. 퀴흘러는 돌파구의 확대를 막으려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예비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인데, 가뜩이나 전선 중앙 르제프(Rzhev) 일대의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더욱 상황이 어려웠다.

독일 중부집단군 주력이 소련의 대공세로 르제프 일대에서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독일의 예비대들이 이곳으로 집중 투입되었던 것이다. 북부집단군은 이처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부집단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상황을 틈타 제2충격군이 3월 10일에 류반 인근까지 30킬로미터를 돌파하였고 북쪽에서 제54군이 협공을 가해 독일군 2개 군단을 포위할 가능성이 커졌다.

변함없는 모습

하지만 이는 독일이 쳐 놓은 그물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초전에 돌파구를 제거하는 데 실패한 퀴흘러는 차라리 소련군을 안으로 끌어들여 섬멸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3월 17일, 모든 준비를 마친 독일은 제2충격군의 배후를 끊고 맹공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지난 겨울에 곤욕을 치렀지만 독일은 아직까지도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소련은 이런 냉엄한 현실을 잠시 오판하고 있었다.

상황은 순식간에 제2충격군이 독일 제18군 한가운데 고립된 형국으로 바뀌었다. 그들의 생명을 잠시 연장시킨 것은 해빙기와 함께 시작된 봄 라스푸티차였다. 진흙 장군이 다시 등장하면서 독일군의 움직임은 중단됐지만 문제는 녹아서 풀려버린 늪지에 소련군도 같이 빠졌다는 것이었다. 결국 독일은 포위망 안에 갇힌 소련군을 포격으로 응징하였고 고립된 제2충격군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류반 전방에 포위된 제2충격군은 마치 작은 레닌그라드 같은 모습이었다. 석 달이 지난 6월 25일, 블라소프(Andrey Vlasov) 사령관을 포함한 3만여 명이 포로가 되면서 제2충격군은 궤멸되었다. 이처럼 소련은 독일 북부집단군이 공세 여력을 상실한 1월부터 반격에 나섰지만 레닌그라드 봉쇄를 뚫는 데는 실패하였고 오히려 8월까지 40여만 명의 손실을 입었다. 독일 북부집단군도 고전하였지만 같은 기간에 15만 정도의 손실을 보는 데 그쳤다.

이처럼 외곽에서는 연일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반면 레닌그라드 도심은 급속도로 안정을 찾아갔다. 라도가 호수의 얼음이 풀려 보급로가 줄어들었고, 포위망으로 인해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시내에서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열렸을 만큼 최악은 넘긴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그해 7월 세바스토폴(Sevastopol) 함락을 성공시킨 만슈타인을 이곳으로 보내면서 다시 한 번 레닌그라드 점령을 독려하였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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