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코프의 등장

레닌그라드 방어를 책임진 북서관구(Northwestern Direction) 사령관 보로실로프는 군사적 능력이 변변찮은 인물이었다. 군과 민간을 독려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전선까지 달려나가 진두지휘하는 용맹함을 발휘하기도 하였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예하 북부전선군 사령관 포포프(Markian Popov)와 북서전선군 사령관 쿠즈네초프(Fyodor Kuznetsov)가 실질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이들을 거시적으로 지휘 통솔하기에는 그릇이나 능력이 너무 작았다.

키예프 전투 종결 후, 전선을 재정비한 독일군이 전 전선에서 진격을 재개하였고 독일 북부집단군도 한 걸음 더 레닌그라드에 가까워졌다. 시 인민위원회는 노약자들을 소련의 내지로 미리 피난시켰으나 이를 능가하는 더 많은 피난민들이 독일군을 피해 레닌그라드로 몰려들었다. 보로실로프는 시민과 피난민 중에 차출한 병력을 북서관구에 긴급 편성하여 방어선에 배치했으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독일이 키예프 공략에 매달려 있는 동안 강화된 방어선이 독일군의 재개된 진격을 틀어막고는 있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독소전쟁 개전 이후 지금까지 소련군의 큰 패전 대부분이 전선 중앙과 남부 일대에서 벌어져 북서관구 지역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작은 편이었지만 전투 의지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독일 공군의 사정권에 들어온 레닌그라드 도심은 연일 폭격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9월 8일, 실리셀부르크(Shlisselburg)가 독일에게 점령당하자 지상으로 레닌그라드와 연결되는 모든 통로가 차단되었다.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와 사석에서 농담과 욕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이제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더 이상 북서관구 사령관으로 놔둘 수는 없었다. 스탈린은 키예프 방어전을 놓고 대립하다가 좌천시킨 전 총참모장 주코프(Georgy Zhukov)를 소환하여 9월 13일 레닌그라드로 보냈다.

당근 대신 채찍을

주코프가 레닌그라드 현지에 부임하였을 때 소련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독일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가 시야에 보이는 외곽 10여 킬로미터까지 다가왔고 그들이 쏘는 포탄이 시내에 떨어지고 있었다. 포위된 상태에서 결사항전을 펼치려면 300여만의 시민들과 100여만의 병력이 먹을 식량이 확보되어야 했는데, 그가 부임하기 하루 전에 대규모 식량 저장소가 폭격으로 전소된 상황이었다.

그동안 독일군의 공격을 대비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도심이 불타오르자 레닌그라드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밖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보니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 보려는 시민들의 원초적 이기심이 팽배해지면서 곳곳에서 약탈이 자행되었다. 도심의 모습이 급속도로 흉흉하게 바뀌자 외곽에 배치된 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이 상태에서 독일군을 저지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주코프는 바닥까지 떨어진 군기를 당장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도 방어를 자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풀에 꺾여 싸워보지도 않고 순순히 도시를 내줄 수는 없었다. 패배의식에 절어 있던 휘하 장병들을 가혹하다 싶을 만큼 들들 볶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반항하는 이들은 즉결 총살하는 강경책까지 불사하였다. 더불어 민간에 대한 강압적인 통제를 펼침으로써 도심의 치안도 서서히 안정시켜 나갔다.

그는 참호를 더욱더 깊게 팠고 도심 요소요소에 대공포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선을 강화하였다. 결론적으로 주코프의 굳은 결심은 도시를 수호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렇게 형성된 레닌그라드의 단단한 방어망이 앞으로 900여 일 가까이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하게 되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레닌그라드의 운명은 바로 이때 내려진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결정되었다.

히틀러의 변심

주코프가 레닌그라드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9월 12일, 히틀러는 북부집단군 예하의 제4기갑집단을 모스크바 공략에 투입하라고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에 명하였다. 이는 전쟁 전부터 레닌그라드를 우선 목표로 여기고,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공격을 독려하기 위해 중부집단군에서 제39장갑군단을 차출하여 북부집단군을 지원하였던 히틀러의 행태를 고려한다면 상당히 의외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모스크바를 먼저 차지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었다.

키예프 공략이 끝나자 히틀러는 갑자기 변심하여 OKH가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입안한 태풍작전(Operation Typhoon)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면서 그동안 연이은 격전으로 소모가 컸던 중부집단군을 지원하기 위해 레닌그라드 목전까지 다가갔던 제4기갑집단을 빼버리는 파격을 단행하였다. 기상천외한 총통의 지시에 사령관 레프를 비롯한 북부집단군 전체가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하였다.

제4기갑집단은 말 그대로 북부집단군의 돌파를 담당하던 유일한 기동부대였다. 그런데 이를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차출하고 더구나 다른 부대를 충원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레닌그라드 점령을 유보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히틀러가 그동안 군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에서 배제시켜 놓았던 모스크바에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어쨌든 9월 들어 그는 갑자기 이곳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히틀러는 키예프 전투의 결과에 고무되어 모스크바만 점령하면 전쟁이 거기서 끝날 것으로 판단하였을지도 모른다. 이미 300여만의 소련군이 지난 두 달 동안 격파되었고, 소련군의 마지막 전력이라 추정되는 대부분의 예비대들이 모스크바 방어에 투입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었기에 충분히 해볼 수 있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도 소련의 저항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한 번에 먹을 수 없는 먹이

어쨌든 레닌그라드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던 제4기갑집단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방향을 틀어 모스크바를 향해 남진하였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북부집단군이 레닌그라드 공략을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9월 17일, 레프는 독일군 6개 사단을 앞세워 레닌그라드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지만 소련의 방어선이 강화된 반면 독일군의 돌파 능력은 현저히 저하되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레닌그라드의 북쪽을 차단한 핀란드군이 진격을 멈추었다. 그들은 지난 겨울전쟁에서 강탈당한 카렐리야(Karelia)를 회복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당황한 독일은 OKW(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부장 요들(Alfred Jodl)을 급파하여 레닌그라드 협공을 설득하였으나 핀란드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레닌그라드 진입이 만만치 않자 독일 북부집단군은 9월 25일부터 진격을 멈추고 포위전을 시작했다.

사실 북부집단군의 예하 부대를 차출하여 모스크바 공략에 투입할 만큼 독일군은 모스크와 레닌그라드라는 두 개의 커다란 먹이를 동시에 먹을 능력이 되지 못하였다. 바바로사 계획 수립 당시에는 3개 병단이 세 곳의 전략 목표를 동시에 점령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독일은 불과 석 달 만에 그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만큼 소련은 광활한 땅이었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저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직접 전선까지 찾아와 레닌그라드 공략이 늦어진다고 닦달하던 히틀러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가 독일이 진격을 멈춘 가장 큰 이유였다. 히틀러는 이 상태로 가만히 있기만 해도 포위된 레닌그라드의 소련군이 항복하고 나올 것이라 예상하였다. 처음부터 모스크바를 중시하였던 독일 군부 일각에서는 히틀러의 이런 반응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주코프는 이런 상황을 몰랐지만 소련에게 이는 엄청난 호기였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