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과 현실

독소전쟁 초기에 독일군은 전 전선에서 놀라운 속도의 진격을 선보였다. 물론 그 와중에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에 막혀 고전을 겪은 곳도 일부 있었지만, 마치 찻잔 속의 태풍처럼 대세를 좌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민스크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처럼 인상적인 대승이 주로 독일 중부집단군 관할에서 연이어 벌어지다 보니 많은 이들이 전선 중앙부를 주목하였다. 당시에도 그랬고 최근의 역사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독일군이 전체 전선에서 경쟁하듯이 놀라운 진격을 선보였던 1941년 8월 이전에 바바로사 계획에서 명시한 진격 목표를 달성한 부대는 북부집단군밖에 없었다. 특히 노브고로드(Novgorod)를 향해 진군하던 예하 제56장갑군단은 개전 4일 만에 무려 320킬로미터를 전진하는 놀라운 기록을 선보였다. 이처럼 연이어 엄청난 대승을 거둔 전쟁 초기의 겉모습과 달리 독일은 생각보다 어렵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점은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데, 우선 바바로사 계획에서 예정한 시간이 너무 타이트하였음을 뜻한다. 연거푸 승리하고는 있었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한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 개시 일주일도 되지 않아 선두의 기갑부대와 이들을 후속 지원할 보병부대 사이에 간극이 생기면서 갈등이 벌어졌고, 그만큼 보급을 추진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한마디로 소련을 너무 우습게 생각한 만용의 결과였다.

북부집단군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서 레닌그라드로 향하던 제4기갑집단의 쌍두마차인 제41장갑군단장 라인하르트(Georg-Hans Reinhardt)와 제56장갑군단장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은 레닌그라드로의 계속적인 진군을 주장하였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너무 빨리 전진하다 보니 병사들도 지쳤고 후속해야 할 보급도 문제가 많았다. 또한 후방에서 고립된 채 저항하는 소련군도 골칫거리였다.

불쌍한 병사들의 부대

7월 중순이 되자 독일 중부집단군이 도심에 머물며 저항하는 30여만의 소련군을 스몰렌스크 일대에 몰아넣고 포위하는 데 성공하였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소련군을 섬멸하기 위해 독일이 전력을 이 일대로 집중시키자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는 이 상태에서 북부집단군이 홀로 진격을 계속하면 우측 면이 길게 노출될 것이라 판단하여 정지를 명하였고 사령관 레프도 이에 동의하였다.

이처럼 노도와 같던 독일의 진격이 레닌그라드에서 100킬로미터 전방인 일멘(Ilmen) 호 근처에서 멈추고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소련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레닌그라드 전면에 깊은 참호가 구축되면서 도시 전체가 요새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소련군이 반격을 개시하면서 OKH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 듯했지만 아직 소련군의 역량은 독일군을 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7월 27일, 북부집단군 사령부를 직접 방문한 히틀러가 진격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채근하고 레닌그라드를 즉각 점령하라고 재촉하였다. 도심에 위치한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전승 행사를 열고 도시명을 아돌프스부르크(Adolfsburg)로 바꾸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이때만 해도 히틀러는 모스크바보다 레닌그라드를 우선 목표로 생각하였다. 사령관 레프는 최선을 다하겠다고는 했지만 그러려면 좀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전선의 모든 곳에서 소모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이를 제때 보충하기 힘들 만큼 독일군의 여건은 좋지 못하였다. 비단 북부집단군만이 더 많은 예비대와 지원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이들은 가장 많은 곤란을 겪고 있었다. 처음부터 관할 섹터가 작다는 이유로 규모도 작았고 이후 전쟁 내내 지원 순위에서도 밀렸다. 그래서 에든버러 대학의 에릭슨(John Erickson) 같은 이는 북부집단군을 ‘불쌍한 병사들의 부대’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양측의 대응

이처럼 전쟁 전체를 살펴볼 때 주로 조연 역할을 담당하던 북부집단군에게 그나마 제대로 된 지원이 이루어진 때가 바로 히틀러의 사령부 방문 직후였다. 8월 5일 모스크바 초입의 스몰렌스크에서 벌어진 전투가 종결되자 중부집단군 소속의 제39장갑군단을 레닌그라드 점령에 투입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총통의 이러한 결정을 중부집단군이 반겼을 리는 없었다.

어쨌든 양 집단군 사이로 벌어졌던 전선이 다시 공고하게 연결되면서 측면의 위험이 제거되고 더불어 장갑군단의 지원이 더해지자 독일 북부집단군은 소련군을 격파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진격이 잠시 지체된 약 보름의 시간 동안 소련의 방어막도 한층 강화된 상태였다. 비록 밀려나고는 있었지만 그동안 소련 북서전선군은 나름대로 선전을 하고 있었다.

700여 대의 전차를 모두 소모해 버린 라세이니(Raseiniai) 전투처럼 격렬한 저항도 있었지만 체계적인 지연전을 펼치며 손실을 최대한 막을 수 있었다. 이처럼 공간을 내준 대신 확보한 전력은 이후 레닌그라드 방위에 있어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긍정적 결과는 스탈린의 시야가 이곳을 벗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스크바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스탈린이 해당 지역의 방위에 관한 전권을 최측근인 전 국방상 보로실로프(Kliment Voroshilov)에게 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소련 북서전선군 사령관 쿠즈네초프(Fyodor Kuznetsov)는 스탈린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비록 패배의 책임을 지고 8월 초에 해임되었지만 종전 후인 1948년까지 주요 부대 지휘관을 연임하였을 만큼 큰 처벌은 당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민스크 전투에서 대패한 서부전선군 사령관 파블로프(Dmitry Pavlov)가 스탈린의 분노를 사서 총살당한 것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희생 대신 얻은 것

그런데 바로 이때 레닌그라드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8월 초 전선 남부의 키예프 일대에 80여만의 소련군이 고립되자 독일군이 포위 섬멸전에 들어간 것이었다. 문제는 그물에 걸린 먹잇감이 워낙 크다 보니 독일 남부집단군 단독으로 작전을 펼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중부집단군 예하의 제2기갑집단과 제2군이 진격 방향을 90도 우향우하여 키예프를 향해 400여 킬로미터를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군부의 후퇴 요구를 스탈린이 거부하고 사수를 선언하면서 소련군이 스스로 적진에서 고립을 자초한 형국이었지만, 적을 서둘러 처단하고 싶었던 히틀러의 적극적인 맞대응으로 인하여 전선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모스크바로 직진하려던 중부집단군은 반발하였지만 독소전쟁 이전부터 키예프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총통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결국 독일군이 대거 재배치에 들어가면서 키예프 일대를 제외한 전선 전체가 진격을 멈춰야 했다.

이처럼 전선이 정체된 틈을 타서 레닌그라드 남쪽에는 루가(Luga) 강에서 네바 강에 이르는 외곽 방어선과 그 안쪽의 페테로프(Peterhof)에서 콜트스키(Koltushy)를 연결하는 2중 방어선이 완공되었다. 더불어 북쪽에는 겨울전쟁으로 국경이 바뀌면서 방치된 요새가 재정비되기 시작했다. 독일이 도시의 50킬로미터 전방까지 다가왔을 때는 총 30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방어선이 구축된 상태였다.

70여만의 소련군이 일거에 몰락한 키예프 전투는 결론적으로 레닌그라드는 물론이거니와 소련의 생존에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벌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독일이 전진을 멈추고 키예프 점령에만 몰입되어 있는 동안 소련 여타 지역의 방어선은 깊게 파여지고 강화되었다. 러시아 제국 이래로 항상 그래왔듯이 소련은 거대한 국토와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용기를 발판 삼아 방어에 필요한 천금같이 귀중한 시간을 얻었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