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8.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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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지옥의 참호전을 개시한 작전

1차 이프르 전투(First Battle of Ypr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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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도중 격전이 벌어지는 곳은 대부분이 정치적, 군사적인 요충지여서 그곳을 차지하려고 애쓰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런데 전선이 수시로 변하면 같은 곳을 두고 여러 번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만일 그러한 곳이 서로가 반드시 차지하려는 요충지라면 격전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4년 동안 전선이 고정되다시피 하였고 변동도 적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이 어느 전쟁보다 치열하였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마른(Marne), 베르됭(Verdun), 솜므(Somme)는 피바다 그 자체였다. 이러한 지옥 중에서 단지 프랑스로 가기 위한 침공로에 놓였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쟁에 휘말려 들어간 벨기에의 이프르(Ypres)에서는 4년 동안 무려 5차례나 격전이 벌어졌다. 그 중 1914년 가을에 있었던 제1차 이프르 전투(First Battle of Ypres)는 1차대전의 상징인 참호전을 고착화시킨 역사적인 전투였다.
 


독일의 실책

극적인 회심의 일격을 가해 전세를 반전 시킨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

1914년 9월 12일, 마른 전투(Battle of the Marne)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제1차대전은 커다란 격변을 맞게 되었다. 전투 자체만 놓고 본다면 연합군이 더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전황이 극적으로 바뀌게 된 결정적 이유는 어려운 와중에도 기회를 노리던 프랑스군 참모총장 조프르(Joseph Joffre)의 일격보다 독일군 스스로 내린 오판 때문이었다. 분명히 계속 공격을 가하여도 되는데 그들은 제풀에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독일군 지휘부 대부분이 소심하게 행동하였다. 제2군 사령관 뵐로브(Karl von Bulow)가 내린 후퇴 결정에 반대하였던 이들이 거의 없었다. 참모본부에서 파견 나온 헨취(Richard Hentsch)는 철수에 적극적이었고 우익에서 진격 경쟁을 벌이던 제1군 사령관 클루크(Alexander von Kluck)도 묵시적으로 이런 결정에 동의하였다. 여기에 더해 참모총장 몰트케(Helmuth J. L. von Moltke)는 수수방관하다시피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동부의 탄넨베르크 전투(Battle of the Tannenberg)에서 있었던 제8군 참모들의 신념 어린 조언이나 예하 부대장들의 소신 있는 항명 같은 훌륭한 반대 의견들은 없다시피 했다. 소심과 조심은 전혀 다른 의미지만 조심이 너무 지나쳐 소심하게 굴었던 것이다. 물론 앞뒤 가리지 않고 진격만 외치는 행위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소심하게 굴었던 이유 또한 한마디로 능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전 정찰 등을 통해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였거나 인근 부대와의 연결 상태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다면 올바른 결정을 하였겠지만 그렇지 못하여 지레 겁먹고 오판을 하였던 것이다. 고무 된 연합군이 즉시 추격을 개시하였지만 방어에 유리한 엔(Aisne) 강에서 독일군이 위치를 선점하고 방어선을 구축하자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덕분에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결국 자신만만하게 전쟁을 개시한 독일은 4년 후 패했다.
 


암중모색


이미 오래 전 수립 된 치밀한 계획에 따라 6주 내에 전쟁을 끝내기로 예정된 서부전선에서 진격이 멈추게 되면서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1914년 9월, 당시에 이러한 마른 전투의 전쟁사적 의의를 깨닫고 있던 이들은 없었다. 헨취 중령이 자신의 오판을 자책하다가 자살한 것도 전쟁 말기인 1918년 2월이었으니, 그때는 대부분이 이러한 대치를 그저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을 뿐이었다.


전쟁 개시 이후 양측 모두 너무 지쳐있었다. 독일군은 폭염에 먼 거리를 진군하여 오느라 맥이 빠졌고 그 동안 밀려나면서 많은 피해를 입은 연합군도 부대 재편이 시급하였다. 따라서 휴식이 필요하였고 원기를 회복하면 전쟁 초기처럼 상대 진영으로 파고들어가 공세를 계속하기로 모두가 마음먹고 있었다. 어차피 벼르고 벼르다 시작된 이 전쟁은 상대를 굴복시키기 전까지 끝날 것으로 예상되지도 않았다.


새롭게 독일군을 지휘하게 된 팔켄하인. 그는 전선을 돌파하여 결정적으로 연합군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org>

당시 전선은 독불국경 남단에서부터 엔 강까지 느슨하게 연결된 상태였다. 이제 막 전쟁 초기의 기동이 멈추며 한숨 쉬던 순간이어서 곳곳에 군사적 행동을 가할 수 있는 구멍들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아직 전략적 공세의 고삐를 쥐고 있던 독일이나 겨우 한숨을 돌린 연합군 모두 이러한 구멍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고자 하였다. 옳은 생각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양측 모두 당장 움직이기는 곤란한 상태였다.


독일군의 지휘권을 인계 받은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은 파리로 향한 가장 가까운 관문인 랭스(Reims) 일대의 방어선이 단단하다고 판단되자, 10월 초에 수아송(Soissons)과 베르됭(Verdun)을 동시에 돌파하여 전선 중앙을 일거에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동안 프랑스군의 방어선도 강화되면서 틈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엔 강 일대에서는 간헐적인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바다를 향한 경주


바로 그때 서로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양측 모두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아송부터 북해(North Sea)까지 전선이 구축되지 않아 텅 빈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곳으로 주력 부대를 우회시켜 상대의 뒤로 치고 들어가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똑같이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팔켄하인은 전선 중앙부에서의 돌파도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이곳은 그대로 놔두고, 새롭게 돌파를 시도 할 우익을 강화하기 위해 앤트워프(Antwerp) 공략에 투입이 예정 된 제9예비군단을 차출하였다.

증원군을 기다리며 힘들게 앤트워프를 공략 중이던 베젤러(Hans von Beseler)는 팔켄하인의 조치에 경악하였고 덕분에 앤트워프 함락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형편으로 본다면 수아송이나 베르덩에 있던 병력을 차출하여 우익으로 이동시키고 후방의 앤트워프는 최대한 빨리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이 맞았다. 이처럼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의 예정 시나리오가 무산되자 전쟁은 순식간 임기응변적으로 변하였다.


반면 연합군은 독일보다 우세하다고 판단한 기병대를 앞세워 벨기에로 진격하여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엔 강과 플랑드르(Flandre) 사이에 부대를 집중 배치되었다. 이처럼 양측 모두 동시에 같은 곳에 전력을 강화하다 보니 정작 공세를 가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결국 빈 곳을 찾아 독일군은 우측으로, 연합군은 좌측으로(즉 서로 같은 곳으로) 우회하여 돌파하려 하였다. 9월 17일, 프랑스 제6군이 먼저 움직였지만 누아용(Noyon) 부근에서 격퇴 당하였다.


우회 돌파구를 찾기 위해 엔 강에서 시작된 바다로의 경주는 10월 초까지 북해를 향해 계속되면서 전선을 한 없이 연장시켰다.
9월 24일, 이번에는 독일이 누아용 서북쪽의 뻬혼느(Peronne)로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프랑스군에 막혔다. 그런데 한번 돌파가 저지된 곳은 참호가 깊게 파지면서 기존에 구축된 진지들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다. 결국 10월 초까지 알베르(Albert), 아라스(Arras), 릴(Lille) 등을 거쳐 북해까지 계속 돌파와 저지가 이어지면서 전선이 엔 강에서부터 단단하게 연장되어 나갔다. 흔히 이를 ‘바다를 향한 경주(Race to the Sea)’라고 한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