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사용한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무기가 출현하면서 이전에 싸웠던 방식이 무효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인류사에 일일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무기들이 등장하였지만 총포나 전투기처럼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 온 새로운 개념의 무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핵폭탄 이후 현재까지 그 정도로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온 신무기의 실전 배치는 아직 없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20세기 초에 등장한 전투기와 현재의 전투기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단지 하늘에서 싸움을 벌이는 무기라는 기본 카테고리 외에는 성능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1,000년 전의 의자와 최신 의자도 결국 같은 용도로 사용하는 것처럼 전투기는 전투기일 뿐이다. 단지 시대상에 적합하도록 진화하여 왔던 것인데 그런 과정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순간은 따로 있다.

다시 전투기를 예로 들자면 제2차 대전 말에 등장한 제트기, 1950년대 중반에 본격 실용화된 레이더와 공대공미사일은 나름대로 전투기 역사의 시대를 구분 지을 수 있도록 만든 기술들이었다. 그리고 21세기 초에 도입된 F-22 랩터(Raptor)는 앞으로 하늘의 주역이 스텔스 전투기가 될 것임을 알리는 커다란 이정표였다. 이처럼 어느 특정 분야의 무기 역사를 새롭게 쓰게 만든 순간이 분명히 따로 있다.

인류가 사용한 오래된 무기 중 하나가 군함이다. 인간이 배를 수천 년 전부터 싸움에 이용하다 보니 엄청나게 변화하여 왔고 그러는 사이에 시대의 흐름을 바꿀만한 놀라운 군함들이 등장하고는 했다. 그 중에서도 20세기 초에 등장한 HMS 드레드노트(Dreadnought)는 해군 역사에 어쩌면 가장 인상적이었을 만큼 강렬하게, 하지만 짧게 막을 내린 거함거포(巨艦巨砲) 시대의 개막을 알린 역사적인 전함이었다.

전함의 등장

17세기에 등장한 전열함(戰列艦)은 이른바 대항해시대를 개척한 군함으로 복층으로 설치된 갑판 선측에 수십 문의 포를 도열하여 공격을 가하였다. 이후 장거리 항해에 적합하도록 선체가 커지고 장착하는 포도 많아졌는데, 나폴레옹 전쟁 당시였던 1815년에 영국 해군이 보유한 최상급 전열함은 최대 104문의 포로 중무장하였을 정도였다. 이처럼 포를 중시한 전열함이 바다의 주인공이 되면서 본격적인 함포의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19세기 중반 이전에 사용되었던 포탄은 목표물까지 날아간 후 폭발하는 작열탄(炸裂彈)이 아니라 마치 투석기처럼 부딪혀 충격을 가하는 방식이었다. 비록 한방에 적함을 격침시킬 수는 없었지만 무수한 포탄으로 적함의 갑판과 측면을 강타하여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포는 사거리가 짧았기에 가까이 접근하여 치열한 포격전을 펼쳐야 했다.

이처럼 근거리에서 서로 포탄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싸우다 보니 공격력 못지않게 수비력도 중요하여 철갑을 둘러 방어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누가 더 많은 포를 장착한 전열함을 동원하여 포탄을 많이 날리고 대신 상대의 공격을 얼마나 견디어 낼 수 있냐에 따라 해전의 결과가 좌우되었다. 그런데 일견 무식해 보이는 이 방법은 제2차 대전 당시까지도 통용된 해전의 시류였다.

시간이 흘러 파괴력이 강화된 포탄과 대구경 포가 등장하면서 더 이상 전열함 방식으로 함포를 배치하기가 어렵게 되자 당시 세계 해군을 선도하던 영국은 선체 중앙에 주포를 배치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였다. 바로 그때 남북전쟁에서 활약한 북군의 장갑 포함 모니터(USS Monitor)의 포탑은 좋은 힌트가 되었다. 만일 포탑이 회전하여 여러 방향으로 공격을 가할 수 있다면 공간을 덜 차지하고도 공격력은 강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871년 영국은 2개의 회전 포탑에 4문의 강력한 12인치 주포를 장착한 데바스테이션(HMS Devastation)급 장갑함을 건조하며 새로운 전투함의 시대를 개막하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처럼 회전 포탑과 중장갑을 갖춘 새로운 주력 군함들이 각국의 새로운 주력함이 되었다. 1892년 영국은 이런 방식의 전투함을 ‘전함(Battleship)’이라 명명하였다. 새로운 바다의 제왕이 등장한 것이다.

러일전쟁의 교훈

최초의 전함들은 주로 8~12인치 구경 대포 2문을 장착한 포탑을 선체 전후에 설치하고 다양한 구경의 부포와 소화기를 측면에 추가로 설치하였다. 한마디로 원거리에 있는 적함과의 포격전은 물론이거니와 근거리에 있는 적과도 교전을 벌일 수 있는 방식인데, 이는 포를 최대한 많이 장착한 전열함 시대의 전통을 여전히 물려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속속 등장한 전함이 위력을 발휘한 사건이 1905년 극동에서 벌어졌다.

러일전쟁 당시에 벌어진 쓰시마 해전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한 사건이었다. 일본 해군의 함포는 새로운 화약과 신관을 사용하였기에 러시아 해군의 함포보다 사거리가 길고 강력하였다. 더해서 영국식 선체를 채택하여 프랑스식 텀블홈(Tumblehome) 선체를 사용한 러시아 전함보다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처럼 속도에서 앞선 일본 함대가 러시아 함대의 사거리 밖에서 유유자적하게 공격을 가하니 승패는 어쩌면 너무 당연하였다.

러시아는 21척 격침, 7척이 나포당하며 전멸하였지만 일본은 불과 3척의 어뢰정만 격침되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이 결과는 이후 전함의 진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포가 아무리 많아도 사거리가 짧고 화력이 약하면 실전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으므로 전함은 원거리에서부터 상대를 충분히 격파할 수 있는 강력한 주포를 위주로 무장하는 것이 옳다고 보게 된 것이었다.

또한 양측의 화력이 비슷하다면 결국 상대의 공격을 견뎌내는 쪽이 이길 확률이 크므로 상갑판과 흘수선 측면의 장갑도 크게 늘리고 또한 보다 좋은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항해 속도도 빨라야 했다. 이렇게 정립된 새로운 개념에 따라 영국 해군 제1해군 경(First Sea Lord, 해군참모총장) 존 피셔(John Fisher)의 주도로 차세대 전함 건조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1906년에 취역한 함이 바로 드레드노트다.

새로운 해군이 시작되다

드레드노트는 당시까지 존재하던 모든 여타 전함들을 일격에 격파할 수 있는 12인치 함포를 무려 10문이나 장착하여 공격력을 극대화하였다. 10개의 함포는 동일한 사격 제원을 가졌기에, 사격 통제를 이전처럼 각 포탑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집중식으로 할 수 있게 되어 명중률도 대폭 향상되었다. 덕분에 구형 디자인을 채택하여 같은 시기에 건조한 전함 넬슨(HMS Lord Nelson)의 두 배에 달하는 전투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이렇게 공격력을 극대화한 것만으로 드레드노트가 해군사에 신기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드레드노트는 당시 대부분 기존 전함들의 주포인 8인치 함포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두터운 장갑을 둘렀음에도 대형 함에 사용된 적이 없던 증기 터빈 추진을 장착하여 순양함과 맞먹는 21노트의 쾌속 항진이 가능하였다. 그야말로 대항마가 전무하였을 만큼 전함의 개념을 송두리 체 바꾸어 놓았다. 이때부터 드레드노트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고 새로 건조되는 전함은 적어도 이 정도의 성능을 갖추어야 했다.

이후 이를 모델로 하여 등장한 전함을 흔히 드레드노트급, 혹은 노급함(弩級艦)이라 부른다. 그래서 전함을 시기적으로 구분할 때 크게 드레드노트 이전(Pre-Dreadnought, 前弩級)과 이후로 나눈다. 한마디로 전함이라는 분류에 포함되었을 뿐이지, 전혀 다른 모습의 전투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20세기 중반까지 해군의 사상을 새롭게 지배한 거함거포 시대가 열렸다.

등장 당시 기준으로 드레드노트는 가히 천하무적이었지만 당연히 이후에 등장한 전함들은 적어도 이보다 강해야 했다. 불과 4년 후인 1910년 더욱 커다란 주포를 일렬로 배치하여 일제 사격이 가능한 영국 해군의 오리온(HMS Orion)이 등장하면서 이른바 슈퍼 드레드노트(Super-Dreadnought, 超弩級) 시대가 열렸다. 오리온이 택한 형태는 이후 마지막까지 활약한 전함인 아이오와 급(Iowa class)까지 이어진 전함의 트렌드가 되었다.

이처럼 더욱 커다란 거포를 장착하다 보니 선체는 갈수록 커졌고 당연히 제작비는 급증하였다. 바다의 패권을 놓고 벌인 열강들의 전함 확보 신경전은 그야말로 국력을 쏟아 부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심각하였고 실제로 경제에 많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특히 영국의 해상 패권에 독일이 도전하면서 20세기 초에 벌어진 건함 경쟁은 제1차 대전의 발발 이유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다.

짧고 굵었던 전성기

경쟁으로 말미암아 보다 강력한 후속 전함들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정작 새로운 시대의 이정표를 열은 드레드노트는 불과 8년 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2선급 전함이 되어버렸다. 전쟁 중 독일 잠수함 U-29를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지만 사실 이는 드레드노트가 탄생한 이유나 목적은 아니었다. 결국 어정쩡한 위치가 된 드레드노트는 1919년 퇴역하였고 1923년에 해체되며 비교적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이는 비단 드레드노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정작 제1차 대전에서 엄청난 국력을 쏟아 부어 구축한 해군력이 그다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1916년 벌어진 유틀란트 해전을 제외하고 대규모의 함대가 정면으로 충돌한 사례도 없었는데, 사실 유틀란트 해전도 단지 규모는 컸다 뿐이지 전쟁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기대와 달리 거함들이 그다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지는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함거포에 대한 집념은 여전하였다. 종전 후 다자간 해군력 군축협상이 개시되었을 때 핵심은 전함이었고 다시 새로운 전쟁의 기운이 임박해지자 비스마르크(Bismarck), 야마토(大和), 아이오와 같은 엄청난 거함들이 탄생하여 바다로 나갔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이 벌어졌을 때 바다의 주인공이 된 것은 항공모함이었다. 그렇게 거함거포 시대는 짧고 굵게 종말을 고하였다.

드레드노트 탄생 이후 40여 년 정도 이어진 거함거포 시대에 정작 전함은 인상적인 흔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만일 전시가 아닌 평화 시라면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함이 활동한 시기에는 인류사에서 가장 참혹하였던 두 번의 전쟁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명성이나 위력과 달리 별로 한 것도 없이 요란만 떨었던 대표적 무기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제원

배수량 20,730톤(만재) / 길이 160.6m / 폭 25.m / 속력 21노트(시속 39km) / 승조원 800명 / 무장 12인치 쌍열 포탑 × 5 (총 10문), 12파운더 부포 27문, 18인치 어뢰발사관 5문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