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1.0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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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세계]

무적의 독일 전차 신화

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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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보빙턴 박물관에 보관 중인 티거 131호. 1943년 영국군이 튀니지에서 노획한 제504중전차대대 소속 전차였는데, 현재 기동이 가능한 유일한 티거로 영화 <퓨리>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1942년 8월 29일, 4대로 구성된 독일의 소규모 전차부대가 레닌그라드 동남부의 소도시인 므가(Mga)의 기차역을 출발하여 인근 고지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이들 뒤로 소수의 인원을 태운 차량이 함께 이동하였는데, 전투 병력은 아니었다. 특이하게도 차량에는 헨셀(Henschel)에서 파견 나온 민간인 기술자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진격에 나선 4대의 전차들은 헨셀이 야심만만하게 만든 신형 전차로 이번이 최초의 실전 투입이었다. 기술진들은 그 결과를 측정하기 위해 독일 본토에서 1,5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최전선까지 온 것이다. 비록 전차들은 움직임이 느렸지만 후속한 차량들이 곧바로 쫓아가기 어려울 만큼 움푹 패인 대지를 거침없이 가로질러 순식간에 고지 위로 사라졌다.


그런데 허겁지겁 고지 위로 쫓아간 기술진들이 보게 된 상황은 몹시 실망스러웠다. 4대의 전차 중 3대가 더 이상 작전을 펼칠 수 없는 상태였는데, 적의 공격에 의해 파손된 것이 아니라 엔진이나 변속기에 고장이 발생하여 기동이 불가능하였던 것이었다. 결국 아무런 전과 없이 1대만 출발하였던 곳으로 귀환하였고 적진에 방치된 나머지 3대는 우여곡절 끝에 회수되었다.


이처럼 최초 실전에서 한심한 모습을 보여준 전차가 독일 6호 전차, 즉 너무나도 유명한 티거(Panzerkampfwagen VI Tiger Ausf.E)다. 몇 달 간 독일군 전차 부대원들에게 들려오던 ‘기적의 신형 전차가 등장할 것’이라는 소문에 비해 그 시작은 퍽 참담한 것이었다. 베를린 정책 당국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런 망신스러운 데뷔와 달리 이후 티거는 ‘제2차대전을 상징하는 전차’라는 명성을 얻으며 역사에 남았다.


프랑스 사무르 박물관에 전시 된 티거로 찌메르트 코팅이 인상적이다. 제102친위중전차대대 소속의 티거로 후기형에 해당한다.

일선의 신형 전차에 대한 요구

현대 의미의 전차를 처음 만든 건 영국이지만 전차를 지상전의 왕자로 만든 나라는 독일이었다. 제2차대전 당시 독일은 무기사에 길이 남을 여러 종류의 전차를 등장시켰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독일은 제1차대전에서 패하면서 중화기의 보유와 개발에 제한을 받았던 나라다. 따라서 1934년 히틀러가 재군비를 선언한 후 본격적으로 전차 제작에 나섰을 때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제일 먼저 제작한 1호, 2호 전차는 차마 전차라고 언급하기 부끄러울 정도였고 전쟁 직전에 도입이 개시된 3호, 4호 전차도 주변국의 경쟁 전차를 압도할 수준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은 전차의 크기를 기존에 설치된 교량을 건널 수 있는 중량까지로 제한하였고 이런 기준에 맞추어 전차를 개발하다 보니 화력과 방어력 일부를 양보해야 했다. 그럼에도 독일의 전차들은 선봉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다했다.


하지만 이는 전차의 성능보다 전차 부대의 편제 및 운용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여러 지휘관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일선에서는 신형 전차에 대한 요구가 계속되었는데 그간의 전과를 분석한 당국도 전차의 생존 능력을 높이려면 결국 화력과 방어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1941년 초, 육군 병기국은 4호 전차를 후속할 신형 전차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유수의 무기 업체들이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던 초기에는 중량 30톤 내외에 75mm구경의 포를 장착하는 이른바 VK3601이 목표였다. 하지만 히틀러가 기동력을 희생하더라도 강력한 화력이 필요하다며 개발에 적극 개입하자 50톤이 훨씬 넘는 VK4501로 개발 방향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방어력 때문이었지만 대구경 포를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전차의 크기가 커져야 했던 것이다.


포르쉐가 제안한 VK4501(P)의 디자인. 경쟁에서 탈락하면서 실험 생산하였던 물량은 이후 페르디난트 구축전차의 차체로 사용되었다.

헨셀 공장에서 생산 중인 티거. 생산성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자재가 부족하여 1.347대만 생산되었는데, 제2차 대전 당시 활약한 주력 전차의 생산량으로는 상당히 적은 편에 속한다.

동부전선에서 들려온 소식

헨셀과 포르쉐가 최종 경쟁에 나섰지만 88mm 56구경장 포와 75mm 70구경장 포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때만 해도 독일의 전성기라서 시간적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VK4501 프로젝트가 이제 막 개시된 1941년 7월, 동부전선에서 들려온 소식은 독일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소련군의 T-34와 KV 전차가 기존 독일군의 모든 전차들을 능가한다는 것이었다.


당장 신형 전차의 개발을 앞당겨야 할 이유가 생겼다. 이때 노획한 소련의 전차들은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다. 사실 티거는 이후 등장한 5호 전차 판터(Panther)나 6호 전차 B형 쾨니히스티거(Königstiger)와 달리 전통적인 독일의 전차 형태를 이어받은 마지막 작품이다. 특히 차체의 각진 모양이 4호 전차와 비슷한데 무게가 2배 가까이 나가므로 한마디로 크기를 확장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그에 걸맞는 동력장치, 현가장치가 제작되어야 했다. 이런 고민은 끝까지 완벽하게 해결되지 못하였고 결국 티거 전차의 약점으로 남게 되었지만 그나마 노획한 소련 전차들로부터 많은 기술적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시제품이 1942년 4월 20일, 생일을 맞은 히틀러에게 공개되었다. 각종 실험 결과 헨셀의 VK4501(H)이 선택되었고, 그해 중반에 전선 투입을 목표로 양산에 착수하였다.


어쩌면 전쟁 중이라서 가능할 수 있었던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개발과 양산 과정이었다. 원래 ‘티거’는 포르쉐가 자신들의 프로젝트였던 VK4501(P)에 붙인 예명이었는데 재미있게도 이것이 이후 6호 전차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지금까지 승리만 계속하다가 1941년 겨울을 기점으로 진격이 막힌 독일군은 티거를 운용할 별도의 부대를 창설하였을 만큼 새롭게 등장한 중전차에 엄청난 기대를 걸었다.


화력과 방어력이 답이었다

가장 먼저 창설된 부대 중 하나인 제502중전차대대 소속의 4대가 가장 앞에 소개한 전투에 투입되면서 티거는 전쟁사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실 데뷔는 창피하게 막을 내렸지만 이는 하루라도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 하던 히틀러의 조급증이 벌인 결과였다. 제대로 된 실험도 거치지 않고 실전에 투입되었던 것이었고 당시 전장 환경도 티거가 작전을 펼치는 데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결과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1943년 7월 라도가 호수 인근에서 포탄을 적재 중인 제502전차대대 소속의 티거.

1943년 쿠르스크 전투 당시 사격을 가하는 티거. 어지간한 장갑을 관통하는 88mm 주포의 강력함은 티거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단점을 보완한 티거가 위력을 입증하는 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1942년 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밀려나던 추축국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된 제501중전차대대가 이듬 해 5월까지 신형 M4을 비롯한 150여 대의 미군 전차를 격파한 것이다. 실패로 시작한 동부전선에서도 빛을 발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대규모 전차들이 자웅을 겨룬 기갑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43년 이후 본격적으로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티거는 상대방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공군의 지원 없는 전차부대 간의 원거리 교전은 일방적이라 할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주포의 사거리와 화력 차이가 크다 보니 티거는 상대방의 사거리 밖에서 유유자적하게 공격할 수 있었던 반면 상대는 티거 격파를 위해 최대한 빨리 근접하여 치고 들어와야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위험했다.


방어력도 티거의 위력을 더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통적인 독일 전차의 디자인을 따른 티거는 경사장갑이 아니었음에도 전면 장갑이 100mm에 이르러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했다. 티거의 명성은 뛰어난 공격력으로 인한 것이지만 어지간한 상대의 공격을 쉽게 막아낼 수 있는 방어력 때문이기도 하다. 일단 생존은 승리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는데, 방어력이 나쁘면 나의 생존 확률이 적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 레니노세르지니 군사 박물관에 전시 중인 티거. 피탄 자국과 파괴된 모습으로 보아 전투 중 격파된 티거임을 알 수 있다. 소련은 티거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본 당사자지만 공교롭게도 개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43년 튀니지에 파견된 제504중전차대대 소속의 티거. 먼저 파견된 제501중전차대대를 도와 티거의 신화를 최초로 써내려 갔다.


2차대전을 상징하는 전차


화력과 방어력 대신 포기했던 기동력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크게 느리지 않았고, 티거가 본격 활약하기 시작한 1943년부터 독일이 수세에 몰리면서 전쟁 초기와 같은 대대적인 공세를 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비 요소가 많은 복잡한 구조는 야전에서 곤란을 안겨주었고, 특히 엔진과 변속기의 성능은 그 당시 기술로 더 이상 개량이 어려웠다.


미군과 소련군의 주력으로 활약한 M4와 T-34가 수만 대씩 생산되었던 것과 비교하기 곤란하게도,티거는 겨우 1,347대 생산에 그쳤지만 그 작은 수치로 제2차대전을 대표하는 전차가 되었다는 점이 티거의 위대함일 것이다. 이는 두말할 필요 없이 놀라운 전과 때문이다. 서부전선 기갑전에서 약 1대5 정도의 교환비를 보였는데, 공군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전차 간의 교전에 의한 손실 비율은 약 1대 10 이상으로 추정될 정도다.

피탄된 티거의 측면을 살펴보는 독일 병사들. 두터운 장갑 때문에 속도는 느렸지만 방어력은 상당히 뛰어났다.

티거는 제성능을 발휘하기 위해 전투 전후에 수시로 정비를 받아야 했다. 변속기를 정비하려면 사진처럼 포탑을 들어내야 하는데 야전에서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다.

역사상 가장 치열한 기갑전이 연속으로 벌어졌던 동부전선에서, 1943년 한 해 동안 소련군이 손실한 기갑 차량이 약 22,000대였는데 이 중 약 5,000대가 티거에 의해 격파된 것으로 알려진다. 당연히 전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에이스들 대부분이 티거를 이용했는데, 100대 이상의 적 전차를 격파한 오토 카리우스(Otto Carius)나 미하일 비트만(Michael Wittmann)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후 등장한 쾨니히스티거가 더 강하다는 평가지만, 전쟁 말기에 등장하여 인상적인 전과를 올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였다. 반면 티거는 역사상 개별 전차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전과를 올린 전차라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전차만 가지고 전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도 없지만 전선에서 마주한 상대에게는 그야말로 죽음의 사신처럼 다가오는 대단한 무기였다. 무기사에 길이 빛날 명작임에 틀림없다.

견인되는 티거. 적진 한가운데서 고장 나거나 피격되었더라도 어지간하면 회수하여 사용하였을 만큼 티거는 독일군에게 상당히 귀한 무기였다. 만일 회수가 불가능하면 파괴시키는 것이 원칙이었다.

티거도 천하무적의 전차는 아니었다. 후면처럼 취약 부위를 타격 받을 경우 피폭되었고 전쟁 후반기에 연합군의 신형 전차는 티거 요격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사진은 1945년 2월 26일 M26 퍼싱 중전차에 의해 최초로 격파된 티거의 잔해.


제원


중량 54톤 / 전장 8.45m / 전폭 3.56m / 전고 3.00m / 승무원 5명 / KwK 36 L/56 88mm 전차포 / MG34 기관총 2정 / 항속거리 150km / 최대속도 45.4km/h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