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6.1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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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세계]

6·25전쟁의 아픈 기억으로 남은

옛 소련의 T-34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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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전격 침공한 독일군은 전 전선에서 쾌속의 진군을 개시하였다. ‘문만 걷어차면 소련이라는 집은 곧바로 허물어져 내릴 것’이라는 총통의 말처럼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뛰어난 소련군 전차 때문에 애를 먹는다는 소문이 곳곳에서 퍼져 나왔다. 하지만 당시 독일군 지휘부는 전사에 길이 빛날 엄청난 진군을 계속하며 소련군을 분쇄하고 있어서 이를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T-34가 독일의 4호 전차를 물리치는 형상을 한 기념물<슬로바키아 소재>

독일군을 놀라게 한 전차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심각하게 곤혹을 치르고 있다는 정식 보고가 속속 올라오자 아무리 승리 와중이라도 더 이상 이를 예사롭게 넘길 수는 없었다. 이 전차를 노획했다는 연락이 전해지자 독일군 수뇌부가 확인 차 현장을 방문하였고, 그 중에는 제2기갑집단 사령관 구데리안(Heinz Guderian)도 있었다. 그는 전차의 개발 및 기갑부대의 조직과 전술 창안에 있어 엄청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흔히 ‘기갑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쟁사의 거물이다.


그러한 구데리안이 새로운 소련 전차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난 후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심히 우려스럽다.” 비록 일부 성능에 대해 흠을 잡았지만 하드웨어 자체만 놓고 본다면 당시 독일이 보유한 그 어떤 전차도 이와 맞서기 어렵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일선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결코 엄살이 아니었고 이를 격파하고 앞으로 나가고 있는 상황이 오히려 대단하였을 만큼 소련의 전차는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로부터 9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기습 남침하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바로 그때 북한군이 가장 전면에 앞세웠던 무기도 바로 이 전차였는데, 이를 막을 마땅한 방어 수단이 없던 국군은 피눈물을 흘리며 후퇴하였다. 이처럼 이 전차는 자신만만했던 독일군을 경악하게 만들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종횡무진 활약하였고, 우리에게는 오래 동안 전차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겨준 장본인이었다. 바로 역사상 최고의 전차 중 하나로 손꼽히는 T-34 중형전차(T-34 Medium Tank)다.


 

T-34의 개발 및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 좌에서 우로 BT-7M, A-20, 1940년 형, 1941년 형

새로운 전차의 조건


1936년 스페인에서 군부의 반란으로 내전이 벌어지자 호시탐탐 공산주의 외연 확대를 시도하던 소련은 이를 호기로 생각하여 인민전선에 군사원조를 하였다. 이때 다량의 기갑장비도 제공되었는데, 소련군이 주력으로 사용하던 T-26 경전차 281대와 BT-5 고속전차 50대가 지원되었다. 그런데 재군비를 선언하고 군비를 확충 중이던 독일도 반란군 편을 들어 33대의 1호 전차로 이루어진 의용군 형식의 기갑부대를 스페인에 파견하였다.


이때 독일과 소련의 전차들이 벌인 교전 결과는 이후 양국의 차세대 전차 개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소련의 전차들은 기관포만을 보유한 독일 1호 전차보다 화력이 강했음에도 장갑이 약해서 근접전에서 곤혹을 치렀다. 따라서 새로운 전차는 방어력 향상이 우선시 되었고 이러한 분석에 따라 1937년에 BT 시리즈 전차를 생산한 ‘하르코프 코민테른 열차공작창(KhPZ)’ 소속의 엔지니어인 코쉬킨(Mikhail Koshkin)은 A-20 이라는 프로토타입 전차를 선보였다.


A-20는 장갑을 기존 전차보다 2배 정도 강화하면서 BT 전차에 일부 적용하였던 경사장갑을 측면에도 확대하여 방어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이 때문에 중량이 늘어났지만 때마침 체르판(Konstantin Chelpan)이 만든 신형 12기통 500마력 V-2 디젤 엔진을 장착하여 야지에서 뛰어난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39년 벌어진 겨울전쟁은 A-20의 화력이 부족하다는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개발 단계였던 A-20이 참전한 것은 아니지만 같은 45밀리미터 포를 장착한 BT 전차들이 화력 부족으로 상당히 애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차세대 주력 전차로 채택하려면 A-20의 화력도 강화하여야 했다. 이에 따라 신형 76.2밀리미터 포를 장작하고 보다 광폭의 캐터필러를 이용하여 주행 안정성을 높인 A-32가 탄생하였다. 각종 시험결과에 만족한 소련 당국 1939년 은 이를 T-34로 명명하고 제식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진격하는 T-34. 경사장갑을 잘 볼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걸작


증가된 장갑에 더해 피탄 효과가 높은 경사 장갑을 채택하여 방어력을 높였고 강력한 화력과 뛰어난 기동력은 한마디로 좋은 전차가 갖추어야 할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여기에 더해 최대한 단순화한 설계로 인하여 저렴한 가격에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즉, T-34는 전차를 다루는 이들이라면 최고의 성능을 가진 당대 최고의 걸물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훌륭했다. 하지만 정작 양산에 돌입하기까지 사연이 많았다.


어이없게도 군부의 권력 다툼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 군부는 피의 대숙청 이후 엄청나게 커다란 지휘 공백이 생기면서 급격하게 재편 중이었다. 스탈린의 총애를 받기 위해 남의 업적을 최대한 깎아내려 하려는 풍조가 만연하였는데, 자신의 능력을 돋보이려 하기 위해 T-34의 채택을 고의로 방해하는 세력까지 등장하기도 하였던 것이었다. 최고 군사 위원이었던 쿨리크(Grigorii Kulik)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이 와중에 코시긴이 사망하고 모로조프(Alexander Morozov)가 개발을 이어받았지만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이처럼 혼란을 겪으며 T-34는 1941년 독소전쟁 발발 직전까지 약 1,000대가 생산되었고 그 중 700여대가 유럽 전선에 배치될 수 있었다. 비록 충분하지 않은 숫자지만 우여곡절 끝에 전선에 투입된 T-34는 전쟁이 발발하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곧바로 위력을 발휘하였다. 대전차 무기의 공격을 가볍게 튕겨내고 전진을 계속하는 T-34에 독일군은 경악하였다.


이처럼 T-34가 개전 초부터 독일군을 놀라게 만들었음에도 전과는 사실 미미하였다. 우선 물량이 충분하지 않았고 효과적으로 전차를 운용할 줄도 몰랐다. 게다가 배치 된지 얼마 되지 않아 훈련이 부족하여 시쳇말로 단독으로 적진을 돌파만하다가 각개 격파 당하여 나가는 무모함만 무한 반복하였다. 독일의 전차와 달리 초기 모델들은 무선장비가 없어 부대 단위로 작전을 벌이기가 곤란하여 이렇게 각개 격파 당하기 일쑤였다.


 

독일군이 T-34를 아무리 격파해도 T-34는 계속 쏟아져 나왔다. T-34는 전쟁 중 8만 대라는 엄청난 물량이 생산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사진은 스탈린그라드 인근의 격파된 T-34들 <출처: (cc) Bundesarchiv>

가장 큰 전쟁에서 승리하다


소련이 새로운 전차를 개발하였다는 사실을 독일도 정보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기존의 BT 전차 정도로 폄하하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의 자신감이나 오판도 없이 표면적으로 5배나 많은 전차를 보유한 소련을 함부로 침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자신만만한 예상과 달리 독일군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T-34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동안의 경험을 밑천 삼아 겨우겨우 격파하고 있었지만 대량으로 등장할 경우 어떻게 될 지 장담하기 힘들었다.


소련 당국은 전선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고무되어 쓸모 없는 경전차의 생산을 중단하고 T-34 제작에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은 역사상 최대로 평가 받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하던 1942년 9월까지도 생산을 계속하였다. 이처럼 T-34는 시간이 갈수록 생산량이 많아졌고 성능 개선도 함께 이루어지면서 전쟁 말기에는 85밀리미터 전차포를 탑재한 개량 형(이른바 T-34/85)이 등장하였다.


 

벨라루스(백러시아) 민스크의 T-34 기념물

종전 후에도 일부 생산이 이루어졌지만 약 8만대라는 엄청난 물량의 대부분이 2차대전 중 제작되어 전선에 공급되었는데, 1944년에는 월 생산량이 1,000대가 넘기도 하였다. 더불어 이를 이용하여 전투를 벌이는 소련군의 능력도 향상되면서 독일군 격파의 선봉장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독일군들도 노획한 T-34를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5호 전차인 판타(Panther)의 개발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정도였다.


물론 단순히 화력이나 방어력만 놓고 본다면 KV 전차나 전쟁 후기에 등장한 독일의 티거(Tiger) 같은 중(重) 전차보다 뒤지기는 했지만 T-34는 이들과 태생적으로 체급이 다른 중형 전차였고 일단 수량에서 다수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2차대전 당시에 등장한 최고의 전차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전차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마디로 (구)소련에서의 애칭이 ‘조국을 구한 전차’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 시내에 진입한 북한군의 T-34 전차 <출처 : 조선일보 DB>

불쾌한 기억


이처럼 T-34는 2차대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차임에도 우리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기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상대이기도 하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북한군이 T-34를 앞세워 남침을 개시하였기 때문이었다.당시 북한은 소련의 지원으로 가장 최신형이라 할 수 있는 T-34/85를 242대나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군은 단 한 대의 전차도 없었고 당시 가지고 있던 대전차화기로 격파하기도 어려웠다.


사실 북한군이 보유한 T-34는 전쟁의 모든 것을 좌우할 만한 결정적 요소는 아니었다. 전쟁 발발 한 달이 지난 1950년 7월 말부터 다양한 전차 저지 수단이 확보되면서 이를 격파하는데 그다지 애를 먹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부터 그다지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초기에 속절없이 밀려났던 쓰라린 아픔과 서울 도심을 질주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두고두고 아픈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T-34는 개발국이자 최대 사용국이었던 소련에서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등장하여 조국을 구한 귀한 전차로 지금도 대접받고 있지만 이처럼 우리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상징물이 되어버렸다. 같은 사물이라도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어쩌면 각각 다른 이에게 혜택과 피해가 동시에 나타나는 무기가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제원 (85형 기준)
중량 32톤 / 전장 6.68m / 전폭 3.0m / 전고 2.45m / 승무원 4명 / ZiS-S-53 85mm 전차포 (적재탄수 60여발) / 7.62mm 기관총 2정 / 항속거리 360km / 최대속도 53km/h


 

남도현 / 군사저술가,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히틀러의 장군들》 등 군사 관련 서적 저술 http://blog.naver.com/xqon1.do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