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3.06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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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세계]

혁신의 집합체

발터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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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P38 <출처: © http://www.adamsguns.com/>

제1차대전은 권총의 재탄생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가 오래된 무기이기는 했지만 그 동안 권총은 전투용으로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사거리가 짧고 파괴력도 부족한데다가 정확성도 좋지 않아 최전선에서는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간의 참호전이 계속되고 좁은 공간에서 피아가 엉켜 싸우는 일이 반복되자 권총은 훌륭한 전투용 무기가 되어버렸다.


주먹이 오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의 교전이다 보니 사거리나 정확도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작아서 휴대하기 편리하고 연사력도 뛰어난 권총에 대용량 탄창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이 등장하자, 그야말로 권총에 날개를 달아 준 격이 되었다. 특히 32발의 트롬멜 탄창을 장착한 독일의 루거 P08의 위력은 조금 과장하면 기관단총 수준이었다. 이처럼 독일군 권총하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를 만큼 루거 P08의 유명세는 대단했다.


 

32발의 트롬멜 탄창과 개머리판을 장착한 루거 P08의 모습 <출처: (cc) Kar98 at de.wikipedia.org>

하지만 정작 독일군 당국은 좋은 권총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흙이나 먼지 같은 이물질에 툭하면 고장이 발생하여 야전에서 사용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뢰성에 문제가 많았고 더불어 단가가 비싸고 제작 시간도 길어 생산성도 나빴다. 단점이 파악되었으면 당연히 이를 개선한 새로운 권총이 나와야 했다. 그렇게 1938년 권총 역사에 커다란 획을 장식한 새로운 권총이 등장했다. 바로 발터 P38(Walther P38)이다.


 

P38의 원형인 AP(Armee Pistole 군용 권총) <출처: © http://www.adamsguns.com/>

새로운 권총의 조건


1935년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부정하고 독일의 재군비를 전격 선언했다. 그리고 그 동안 감시의 눈길을 피해 은밀히 연구하던 수많은 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본격 진행하게 되었다. 보유가 금지되었던 전차와 전투기를 비롯한 최신예 무기들이 속속 도입되었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주변국들이 놀랄 정도였다. 동시에 군부에서 불평 대상이었던 기존 무기에 대한 개량이나 대체 사업도 함께 개시했다.


여기에는 권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선에서 툭하면 고장 나는 P08보다 좋은 권총을 요구했고, 이런 사정을 이미 잘 알고 있던 당국은 여러 총기 제작사에 새로운 제식 권총 개발을 의뢰 했다. 계획상으로는 기존의 P08을 모두 대체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여서 관련 업체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독일의 총기 명가인 발터 사도 그러한 경쟁 업체 중 하나였다.


새로운 권총의 개발 콘셉트는 간단했다. 야전에서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신뢰성이 좋고 제작비도 싸며 툭하면 발생하는 오발 사고를 막을 안전성만 확보하면 되었다. 물론 성능의 개량이 이루어지면 금상첨화였지만 권총의 기본적인 성능을 획기적으로 증대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도 100년 전에 개발된 일부 모델을 일선에서 사용할 정도로 권총은 목적이나 용도가 지극히 한정된 무기이기 때문이다.


 

P38과 홀스터 <출처: © http://www.adamsguns.com/>

이미 개발했던 총


발터 사는 군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AP(Armee Pistole 군용 권총)를 이미 1936년에 개발한 상태였다. 약 55정의 초도 시험 물량이 제작된 AP는 내장 해머식으로 총의 슬라이드 측면에 안전장치인 디코킹 레버를 부착했다. 레버를 잠그면 슬라이드 작동 유무와 상관없이 해머가 코킹되지 않고 방아쇠는 계속 안전 상태를 유지하며, 레버를 해제하더라도 힘을 주어 방아쇠를 완전히 당길 경우에만 발사가 이루어졌다.


이를 시험해본 군은 상당히 호평했고 이에 고무 받은 발터 사는 개량 모델을 1937년 내놓으면서 HP(Heeres Pistole 육군 권총)이라는 자신만만한 명칭을 부여했다. HP는 독일군의 제식 탄환인 9mm 파라블럼탄을 사용했는데 몇몇 생산품은 실험적으로 .30루거 탄환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정식 채용 전부터 호평을 받은 HP는 약 3만 정이 생산되어 일부는 외국에 수출까지 되었다.


이처럼 제작사의 자신감이 가득 담긴 HP는 예상대로 독일군 당국의 시험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군의 요구 사항에 맞추어 약간의 개량을 거친 후, P38이란 명칭을 부여 받고 1938년 제식화되었다. P08의 고질적인 단점을 완벽히 개선한 발터 P38은 전쟁 기간 중 북아프리카의 사막, 러시아의 동토처럼 가혹한 전선에서도 문제없이 작동했다. 더불어 디코킹 레버와 AFPB(Automatic Firing Pin Block)라는 2중의 안전장치 덕분에 고질적인 오발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외부 충격으로 해머가 오작동 되지 않도록 파이어 링 후미에 장착된 AFPB는 오발사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이처럼 발터 P38은 성능은 물론 안전성까지 보장된 최고의 권총으로 특히 최초의 더블액션 방식 군용 권총이기도 했다. 방아쇠를 당겼을 때 공이 또는 공이치기가 후퇴했다가 전진하여 격발하는 더블액션 방식은 이후 현대 자동권총의 개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발터의 전작인 PP에서 전수 된 기술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싱글액션 방식으로도 사격이 가능하다.


 

발터 P38은 현재도 총기상의 주요 품목으로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출처: (cc) Rama at Wikimedia.org>

역사를 개척한 권총


더블액션은 약실 안에 탄이 들어있으면 곧바로 격발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리볼버와 달리 내부구조가 복잡한 자동권총에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발터 사는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를 자동권총에 적용하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콜트 M1911 권총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사격 시 총신이 위로 들리는 문제를 로킹 블록식 쇼트리코일 기술을 사용하여 최초로 극복했다.


발터 사는 이미 오래전에 더블액션 관련 기술을 확보하였고 1929년 제작한 PP권총에 이를 적용하여 경찰용으로 납품하기도 했다. 이 기술을 제작에 도입하면서 P38은 방아쇠만 당겨 속사가 가능하면서도 명중률이 뛰어난 최초의 더블액션식 군용 권총이 되었다. 한마디로 P38은 권총에 적용할 수 있는 혁신적인 모든 기술이 응집된 권총이라 할만 했다.


여담으로 P38 정도의 성능에 근접한 새로운 자동권총이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초 베레타 M92권총이 제식화하면서부터다. 그 정도로 P38은 시대를 앞선 무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혁신적인 신뢰성과 안전성 덕분에 P38은 자동권총의 기본 틀을 제시한 M1911, 198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글록과 더불어 자동권총의 역사를 개척한 3대 권총으로 뚜렷하게 자리매김했다.


 

전후 P1이라는 이름으로 생산이 재개되어 독일연방군과 경찰에 납품이 되었다. <출처: (cc) Ralf Dillenburger>

영원히 기록될만한 권총


물론 P38에게도 단점이 없지는 않았다. 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바로 생산성이었다. 워낙 정교하게 만들다 보니 많은 부품이 들어갔는데, P09가 45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반면 P38은 52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생산과 조립에 더 많은 시간이 들었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독일군이 원하는 수량을 제때 공급하기 곤란했고, 결국 독일군은 도태시키려던 루거 P08을 계속하여 함께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P38의 가격이 P08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 많은 부품이 쓰이고 제작시간도 더 걸린다면 가격이 비쌀 것이지만 정작 그렇지 않았다. 이런 아이러니한 결과는 발터 사가 원자재나 부품 조달에 있어 최신 경영기법을 도입하여서 그랬다기보다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독일은 무기나 군수물품 제작에 포로나 유대인처럼 강제로 동원한 노동력을 이용했었다.


P38은 여러 나라에 수출되거나 라이선스 생산되었고 독일에서는 2차대전 직후에 일단 생산을 중단했지만 군경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1957년 P1이라는 새로운 제식부호를 부여하고 2000년까지 꾸준히 생산했다. 이처럼 혁신의 집합체인 P38은 앞으로 새로운 권총이 등장하여도 그 권총이 화약을 사용하는 한 더 이상의 혁신적인 발전이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이론의 여지없이 총기 역사에 있어서 거대한 한 획을 그은 걸작이었다.


 

 남도현 / 군사저술가,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히틀러의 장군들》 등 군사 관련 서적 저술 http://blog.naver.com/xqon1.do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