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폭탄은 적의 거점을 정밀하게 타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전쟁 수행의지를 일거에 무너뜨리려는 목적으로 탄생하였다. 지금은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을 목표지점까지 보낼 수 있는 수단이 장거리 미사일을 비롯하여 다양한 편이지만 핵폭탄이 처음 등장하였을 때 이를 탑재할 수 있는 운반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이 적의 요격을 물리치고 안전하게 장거리를 날아가 거대한 핵폭탄을 일본 본토에 투하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았을 때 오히려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후 전략 폭격기의 아버지가 되는 B-29 슈퍼 포트리스(Super Fortress)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공군 폭격기에 놀란 미국

1935년 나치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자 그 동안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평화는 끝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공개적으로 재군비를 추진한 독일은 그들의 힘을 선전하는데 여념이 없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주변국 군사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훈련을 참관시키거나, 새로 개발된 신무기를 공개함으로써 노골적인 협박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세계가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긴장된 기운이 고조되었던 1939년 4월, 일단의 미 육군 항공단(USAAC-United States Army Air Corps) 관계자들이 차후 전쟁 발발 시 적국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던 독일 루프트바페(Luftwaffe, 공군)를 참관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거대한 대서양에 의해 유럽과 동떨어진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항공 전력 정책은 전투기보다 장거리 작전이 가능한 폭격기 부대 육성에 주력하였다. 즉, 중무장한 장거리 폭격기를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는 전술이었는데, 이것은 이후 후방의 전략 요충지를 타격하여 상대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어버리는 전략 폭격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한마디로 가상의 적들이 대양을 건너 미국까지 날아와 공격하기는 어렵다는 신념이 전제 된 정책이었다. 따라서 1941년 12월 항공모함을 이용하여 비록 본토는 아니었지만 하와이를 급습한 일본의 작전에 미국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던 것이었다.

어쨌든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당시 미국의 전투기 성능이 유럽 열강들의 경쟁 기종들과 비교하여 뒤쳐졌다. 미국도 그러한 사실은 인정하였지만 그래도 폭격기만큼은 앞서고 있다고 자부하였고 사실 본격 제식화하기 시작한 4발 엔진의 B-17 중(重)폭격기처럼 그들이 보유한 폭격기는 당대 최고라 할만 했다. 그런데 독일 공군을 방문한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경악 바로 그 자체였다. 막상 그들이 참관한 루프트바페도 뛰어난 폭격기들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불과 4년 전에 재군비를 선언한 나라답지 않게 그들이 참관한 독일 공군은 강력하였다. 독일의 사상은 미국과 달라서 지상군을 근접 지원하는 공중 포대의 개념으로 공군을 발전시켰다. 비록 미국의 주력 폭격기인 B-17보다 객관적인 성능이 미흡하였지만 그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Ju-87, He-111을 비롯한 독일의 폭격기세력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처럼 독일은 자신들의 사상에 특화된 다양한 종류의 중(中)폭격기를 이미 일선에 배치하여 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설령 독일이 전쟁을 일으켜도 미국과 당장 교전을 벌일 가능성은 적었지만 그래도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우호적으로 지낼 가능성이 크지 않았던 가상 적국이 이처럼 좋은 무기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걱정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참관단은 귀국하자마자 상대를 강력하게 압도할 새로운 폭격기의 개발을 정책 당국에 건의하였는데 골자는 이제 막 등장시킨 B-17보다 더 강력한 무장 탑재량과 장거리 비행능력을 지닌 폭격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해 9월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계획은 즉시 실행에 옮겨졌다.

 

1940년대 최신 기술의 응집체

미 육군은 차세대 폭격기의 제작을 여러 제작사에 의뢰하였고 1941년 제출된 여러 시안 중 보잉(Boeing)社의 제안을 전격 채택하였는데, 설계 도면만 보고 선 발주하였을 정도로 보잉사의 제안 내용은 경쟁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일본의 급습으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직후인 1942년이 되자 개발 과정에 있던 이 최신예 폭격기는 이미 1664기나 주문되어 있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당대 최고의 기술을 집합체였는데 그중 일부는 현대 항공기 제작에도 이용되고 있을 만큼 혁신적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사천리로 순탄하게 개발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여러 문제로 말미암아 수 차례의 설계변경이 있어 제작에 차질을 빚었고 1943년 2월에 있었던 시험 비행에서 실험기가 추락하는 암담한 사고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보잉은 그해 7월 모든 요구 사항을 만족시키는 완성 시제품이 선보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최초의 전략폭격기로 인정받는 유명한 B-29다.

B-29는 10톤의 폭장량과 6,000킬로미터에 달하는 항속거리, 9000미터의 고고도에서 작전능력을 갖추어 기존의 폭격기가 가지고 있던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괴물이었다. 새롭게 개발 된 여압장치(Cabin Press Regulator)는 승무원들이 산소마스크와 방한복 없이 평상복차림으로 편안하게 근무할 수 있게 해주었고 비행 기록을 기록해주는 블랙박스 장치도 장비되었는데 이러한 기술은 민항기의 발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태평양 전쟁 : B-29의 짧고 화려한 전성기

1944년 3월, 미 육군 항공대(USAAF-United States Army Air Forces 1941년 USAAC가 확대 창설되었고 이후 미 공군이 되었다)가 B-29로 이뤄진 제20폭격사령부를 창설할 무렵 유럽 전선은 독일의 패망이 가시화되면서 그곳에서 작전을 펼치던 미 8공군이 보유한 기존의 B-17만으로도 충분히 작전이 가능하다고 판단되자 미 육군은 B-29를 태평양 전선에 투입하였다. 이것은 상당히 올바른 정책이었는데, 섬과 섬으로만 연결되는 거대한 태평양 전선의 특성상 장거리를 비행하여 직접 일본 본토를 타격하기에는 B-29가 훨씬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1944년 3월부터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B-29는 수백 회에 걸쳐 일본 본토를 맹폭격하여 66개 주요 도시를 말 그대로 불바다로 만들어 일본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독일을 불바다로 만들었지만 약 30퍼센트가 격추되었을 만큼 많은 고초를 겪은 B-17과 달리 태평양 전선의 B-29는 호위기의 엄호도 없이 일본본토 구석구석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폭격을 해대었다. 대공포가 도달하지도 못할 고고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느긋하게 폭탄을 퍼부어대는 B-29 편대를 일본은 그냥 뻔히 쳐다보아야만 했다. 일본의 전투기들은 B-29의 비행 상공까지 올라가지 못하여 요격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단지 투하한 폭탄이 빗나가거나 불발탄이 되기를 바라는 방법 외에는 일본이 대처할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B-29가 요격 범위 내로 진입하지 않는 한 일본이 B-29를 잡을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의 무지막지한 폭격에도 불구하고 전 국민을 옥쇄 시켜서라도 필사의 항전을 하려는 일본 수뇌부의 비상식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미국은 결정타를 날리게 되었는데 바로 핵폭탄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B-29가 투하한 핵폭탄으로 일본은 반항을 멈추고 전쟁이 끝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핵폭탄 투하가 가능한 새로운 개념의 전략 폭격기가 등장하였음을 의미하는 군사 전략상 혁명이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전략 폭격의 개념은 핵폭탄을 장착한 장거리 중폭격기가 담당하는 것으로 각인되어 버렸고 이 때문에 B-29는 전략 폭격기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하였다.

한편, 공동의 적을 상대로 함께 전쟁을 벌이고는 있었으나 차후 미국과 적대 관계에 설 것으로 예상되던 소련은 B-29의 능력을 너무나 탐낸 나머지 전쟁 종반기인 1944년 초, 미국에게 정식으로 대여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소련이 장차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동상이몽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소련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만큼 B-29는 미국만이 가지고 운용하여야 할 최고의 비밀 무기였다. 그러던 중 1944년 말, 일본 공격에 나선 3대의 B-29가 작전 도중 문제가 생겨 소련 연해주에 불시착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소련에게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사건이었다.

 

피아 모두의 전략폭격기의 아버지가 되다

소련은 이 기체들을 반환하지 않고 철저히 분석하여 B-29를 모방한 Tu-4 폭격기를 제작하여 1947년 3월에 첫 비행을 실시하였다. 이후 이를 발판으로 기술을 발전시켜서 1952년 대형 장거리 전략폭격기로 Tu-95 베어(Bear)를 제작하였는데 이 중(重)폭격기는 현재도 일선에서 운용 중에 있다. 이것은 핵폭탄을 장거리 운반하여 투하 할 수 있는 능력을 소련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후 핵폭탄을 개발해낸 소련이 B-29와 맞먹는 장거리 전략폭격기를 가짐으로써 역사상 최대의 전쟁을 끝내자마자 인류는 핵폭탄과 냉전이라 불린 공포의 시대를 겪게 되었다. 결국 B-29는 소련 전략폭격기의 아버지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제트 시대의 도래와 함께 급격히 퇴조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뽐내던 B-29도 제2차 대전 유럽 전선에서 독일 요격기에 고초를 겪은 B-17처럼 탄생한지 불과 6년도 되지 않아 호위기의 도움을 받아야만 작전에 나갈 수 있는 나약한 모습으로 전락하였다. 프로펠러 시대에 유유히 하늘을 휘젓고 다니던 철옹성이 불과 몇 년 후 도래한 제트 시대에는 MiG-15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 도망 다니기 바쁜 처지로 전락한 것이었다.

이런 점은 야심만만하게 전략폭격기를 막 제식화한 소련에게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는데, 찬란하게 시작했던 공룡의 역사가 의외로 쉽게 시들해져 버린 셈이었다. 오늘날 전략 폭격기로 손꼽는 B-52, B-1, B-2, Tu-26, Tu-160 같은 기종도 사실 폭격기의 단독적인 작전은 불가능할 정도라고 보아야 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 둔중한 덩치와 극악한 기동력 때문에 요격당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비록 스텔스 성능을 가진 B-2라는 괴물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날아다니는 대형 폭격기들은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된 경우에나 운용할 수 있는, 극히 제한된 사용성을 가진 무기다. 더구나 날렵한 요격 수단과 더불어 장거리 미사일 같은 대체 공격 수단 때문에 그 입지는 점점 줄어든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글 남도현 / 군사저술가,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히틀러의 장군들》 등 군사 관련 서적 저술 http://blog.naver.com/xqon1.do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