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1.02.0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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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세계]

조선군의 자존심

각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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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풍속화 중 활쏘기 장면, 전통 활쏘기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왜적들은 중국의 창법(槍法), 조선의 편전(片箭), 일본의 조총이 천하제일이라고 항상 말했다.’


일본인들이 중국의 창술, 편전을 사용한 조선의 활쏘기, 일본의 조총을 동아시아 삼국을 대표하는 무술 혹은 무기로 손꼽았다는 이 기록은 1614년(광해군 6년)에 편찬된 조선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에 실려 있다. 이처럼 조선의 활쏘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을 대표하는 무예로 인정 받았다.


 

군인의 진급을 좌우한 활쏘기


심지어 임진왜란 종전 직후인 1598년(선조 31년)에 출간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무예 서적으로 손꼽히는 《무예제보》에는 “조선은 칼 쓰는 법과 창 쓰는 법은 전혀 배우지 않고 오로지 활쏘기만 연습했다”는 구절도 나온다.


1543년에 작성된 법전인 《대전후속록》에는 군인들의 활쏘기 성적에 따른 포상과 처벌 규정이 명기되어 있다. 활쏘기 성적이 나쁘면 진급과 포상의 기준이 되는 근무 인정 일수를 삭감했고, 두 차례 활쏘기 시험에 불참할 경우 품계를 강등하기까지 했다. 사정이 이런 만큼 조선의 군인이라면 활쏘기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가장 자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일과 중에 하나가 활쏘기다. 이순신은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 동안 일기를 썼는데 그 중 1593일 분의 일기가 남아 있다. 이 1593일 분의 일기에 총 264회의 활쏘기 연습 기록이 등장한다. 남아 있는 일기만으로 치면 대략 6일에 한 번 활쏘기 연습을 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한 번 활을 쏠 때 평균 35발(7순)을 쏘았으므로 임진왜란 중 장군이 연습용으로 쏜 화살의 수는 최하 8000발이 넘었을 것이다.


 

수원 연무정. 우리나라 활터의 사대와 과녁 사이의 거리는 145m다.

조선시대 군인의 활 실력


이순신 장군은 1592년 3월 28일자 일기에서 50발을 쏘아 표적에 43발을 명중했다고 기록했다. 이 같은 성적은 조선시대 군인들의 활쏘기 실력 중 어느 정도 수준일까. 임진왜란 종전 8년 후인 1605년에 함경도에서 군관으로 군 생활을 한 박계숙과 역시 1644년에 함경도에서 군관으로 복무한 박취문 부자가 대를 이어 기록한 《부북일기》에서 그 해답을 구할 수 있다.


일기의 주인공인 박계숙은 50발을 쏘아 48발을 맞춘 기록도 있고, 50발을 쏘아 50발을 모두 명중한 사례도 있다. 그의 아들 박취문은 더 뛰어나서 5발을 10번 쏘아 모두 명중하는 ‘5순 몰기’ 기록이 여러 번 보인다. 심지어 다른 명사수인 군관 이시복과 활쏘기 시합을 벌여 189발을 연속 명중하기도 했다. 박취문의 활쏘기 능력이 대단해 보이지만 시합결과는 200발을 연속 명중한 군관 이시복의 승리였다.


《부북일기》에서 함경도 군관들의 활쏘기 기록을 보면 성적이 가장 나쁜 군관들의 기록이 50발을 쏘아 43발을 맞추는 수준이었다. ‘50발 발사 43발 명중’이라는 이순신의 활쏘기 성적은 1600년대 중반 함경도 군인들의 활쏘기 실력과 비교하면 하위권에 해당하는 셈이다. 일반 병사들의 활쏘기 실력은 이보다 낮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조선시대 군관 이상 무관들의 활쏘기 능력은 상당한 수준이었음이 분명하다.


 

조선시대의 활 사거리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사용하던 화살 종류인 유엽전의 경우 120보 쏘기가 기본이었다. 1보는 보통 1.2m로 환산하므로 120보는 144m가 된다. 현대의 국궁 활쏘기에서도 이 같은 규격을 약간 조정해 보통 145m 거리에서 활을 쏜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편전은 130보(약 156m) 거리에서 사격을 했고, 무과시험에서는 150보(약 180m) 거리에서 과녁을 맞히는 종목도 있었다.


이 같은 무과시험의 활쏘기 거리 기준이 활의 최대 사거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같은 종류의 활이라도 크기나 제작방법에 따라 사거리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팔 힘이나 화살의 형태와 무게에 따라서도 사거리 차이가 벌어진다. 또한 활을 쏘는 각도도 사거리에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으로 각궁은 최대 300m까지 날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 같은 변수를 생각하면 구체적인 조건을 특정하지 않는 한 최대 사거리는 크게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참고로 같은 합성궁 계통의 활인 터키 활의 경우 최대 845.5m까지 날아갔다는 주장이 있다.


해군사관학교에 소장된 조선시대 수군의 교범인 《수조규식》을 보면 전투시 적용할 여러 가지 무기의 사거리가 나와 있는데 각종 총통은 200보(약 240m), 조총은 100보(약 120m), 활은 90보(약 108m)로 규정되어 있다. 실전에서는 원하는 표적에 명중시킬 수 있는지 여부가 가장 중요하므로 활 성능상의 최대사거리보다는 짧은 사거리에서 활을 쏘았음을 알 수 있다.


말 위에서 활을 쏠 때는 좀 가까운 거리에서 활을 쐈다. 조선 후기에 널리 보급됐던 《사법비전공하》라는 책을 보면 “말 타고 쏠 때에는 10~20보(약 12~24m)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화살을 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어 기병은 근거리에서 활을 쏘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병법서적 중에 하나인 ‘병학통’을 보면 당시 기병은 적이 100보(약 120m) 거리에 들어오면 활을 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말을 정지시킨 상태에서 사격법이어서 일반적인 기병들의 활쏘기와는 차이가 있다.


 

편전과 통아

조선시대의 활 사격법과 편전


우리나라 활을 쏘는 방법은 양궁의 사격법과는 차이가 있다. 화살을 쥐는 방법도 다르다. 국궁 사격에서는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 깊숙한 곳에 시위가 물리고, 엄지손가락을 다른 손가락 안쪽으로 꺾어 넣은 후 엄지손가락 위에 화살을 놓는 방식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합성궁을 사용하는 중국, 몽골에서도 널리 사용하는 방식으로 국제적으로는 몽골리언 릴리즈(Mongolian release)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메리카 인디언 등은 엄지손가락으로 화살 끝을 누르면서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에 시위가 걸리게 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방식을 이 핀치 릴리즈라고 부른다. 유럽과 지중해 연안지역에서는 집게손가락과 중지 끝으로 화살을 쥐고 여기에 약지까지 더해 세 손가락으로 시위를 잡는 방법도 사용했다. 이것을 지중해식 릴리즈라고 부르는데 현대 양궁에서도 널리 사용하고 있다.


화살을 놓는 위치도 다르다. 오른손잡이가 쏘는 국궁이라면 표적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활의 오른쪽에 화살이 놓인다. 이에 비해 양궁에서는 활의 왼쪽에 화살이 놓인다. 사극에서 국궁 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 같은 국궁 사격법을 제대로 재연하지 못하고 양궁 쏘는 방식으로 찍어서 논란이 된 경우도 많았다. 다행히 근래의 [추노], [성균관 스캔들] 등에서는 좋은 고증으로 제대로 된 활쏘기 모습을 보여주어 많은 이들의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이수광이 조선을 대표하는 무기로 손꼽은 편전은 사실 일반적인 활쏘기에서 사용하는 화살이 아니다. 통아(桶兒)라고 부르는 반으로 쪼갠 대나무관 위에 화살을 놓고 쏘는 특수한 방식의 활쏘기에서 사용하는 화살이 바로 편전이다. 화살이 짧다는 점에서 애기살이라고 부르는 편전은 통아 위에 화살을 놓고 쏘기 때문에, 길이가 짧은 화살을 쏠 때도 화살 길이와 상관없이 시위를 당길 수 있다.


편전은 화살이 짧아 상대방이 화살을 눈으로 보기가 어렵고 사거리도 일반 화살에 비해 더 긴 것이 특징이라고 알려져 있다. 편전은 기록상으로는 1000보나 날아갔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로 긴 사거리가 특징이다. 이 같은 활쏘기 방식은 서남아시아 지역에서도 사용했지만, 동아시아권에서는 우리나라가 가장 널리 사용했다. 심지어 국경지역에서는 편전 쏘기를 금지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외국에 알려지면 안되는 특수한 기술로 취급하기도 했다.


 

각궁의 각부 명칭과 재료

조선의 대표 활 각궁은 합성궁의 일종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활이 쓰였지만 무관들이 사용하는 활은 각궁(角弓)이었다. 각궁은 나무, 힘줄, 쇠뿔 등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재료를 천연 접착제로 결합한 활이었다. 나무를 그대로 다듬어서 활로 만드는 단일궁이나 성질이 약간씩 다른 나무를 여러 조각 결합해서 만드는 복합궁과는 달리 나무, 힘줄, 쇠뿔을 조합해서 만드는 각궁 같은 활을 합성궁(Composite Bow)이라고 부른다.


합성궁은 시위를 풀었을 때 활이 굽는 것이 특징인데 이런 활을 굽은 활이라는 의미에서 만궁(灣弓)이라고 부른다. 만궁 중에서도 합성궁 계열의 만궁은 시위를 풀었을 때 활이 거꾸로 뒤집힐 정도로 활의 탄성이 강하다. 합성궁-만궁 형태의 활은 말에서 사용하기 좋게 길이가 짧은 것이 특징인데 이런 짧은 활을 단궁(短弓)이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 영국 롱보우나 일본 전통 활처럼 시위를 풀었을 때 곧게 펴지는 활이 있는데 이런 활이 바로 직궁(直弓)이다. 단일궁-직궁 계열의 활은 활을 보통 길이를 매우 길게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장궁(長弓)이다. 직궁-장궁 계열의 활은 단일 재료로 만드는 단일궁이나 비슷한 재료를 써서 만드는 복합궁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각궁은 바로 합성궁-만궁-단궁에 해당하는 활로 강한 탄성과 복원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길이가 짧은 것이 특징이다. 합성궁은 특히 길이가 짧아서 휴대하기가 편하므로 말 위에서 기병들이 쏘는 활로 매우 적합하다. 이 때문에 이런 종류의 합성궁은 우리나라와 이웃 중국은 물론이고 만주족부터 몽골, 투르크에 이르기까지 기병으로 초원지대를 휩쓸면서 대제국을 건설했던 집단은 예외 없이 사용했다.


 

위화도 회군의 핑계가 된 합성궁의 약점


조선시대 각궁은 나무로 활의 기본 뼈대인 활채를 만들고 활채 안쪽에는 쇠뿔을, 활채 바깥에는 소의 힘줄을 덧붙여서 제작했다. 각궁을 포함한 합성궁 계열의 활은 나무, 힘줄, 쇠뿔을 조합해서 만든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세부 재료나 가공 방법, 크기 등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름의 개성이 있다. 이를테면 조선의 각궁은 활 양쪽 끝의 고자는 산뽕나무로 만들고, 손잡이 부분에는 참나무로 만든 대림목을 붙여 강도를 보강했다.


이처럼 각궁을 비롯한 합성궁은 여러 가지 성질이 다른 재료를 결합해서 활을 만들기 때문에 접착제가 필요하다. 합성궁의 접착제로 동물성 천연접착제인 아교를 주로 사용했으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바다 물고기인인 민어의 부레로 만든 어교(魚膠, 부레풀)를 널리 이용했다.


이처럼 접착제를 사용해서 활을 만들었기 때문에 비가 오거나 습도가 높으면 접착제의 접착력이 약해지는 것이 각궁을 비롯한 합성궁의 약점이었다. 1388년 고려의 장수였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면서 명나라 요동을 정벌할 수 없는 이유로 내걸었던 4불가론의 하나로 "때가 바야흐로 덥고 비가 많은 계절이라 쇠뇌와 활의 접착제가 풀린다"고 언급한 것이 바로 이 접착제 문제를 지칭한 것이다. 서로 성질이 다른 재료를 접착하는 만큼 가공 방법이 복잡하고 제조 기간이 긴 것도 각궁을 비롯한 합성궁의 약점이었다. 각궁 제조 가정에서 손 3700회 이상의 손질을 해야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시위를 결합한 각궁과 시위를 푼 상태의 각궁

사라진 흑각궁, 다시 세상에 나올까


조선시대 각궁은 다시 뿔의 종류와 사용하는 나무의 종류에 따라 몇 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군대에서 사용한 군용 각궁 중 가장 성능이 좋은 활은 흑각궁이었다. 흑각군궁(黑角軍弓)으로 불리는 군용 흑각궁은 활채를 대나무가 아니라 산뽕나무로 만들고, 뿔은 수입산 검은색 물소뿔을 사용했다. 또 표면을 실로 감고 옻칠도 해서 내구성을 보강한 것이 특징이다.


흑각궁에 사용하는 물소뿔은 주로 동남아시아나 남중국에서 생산됐다. 조선은 이를 중국이나 일본을 거쳐 수입했으므로 물소뿔을 안정적으로 수입하는 일은 조선 왕조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명나라는 무기 재료로 사용되는 물소뿔의 수출량을 1회 교역당 50개 정도로 항상 일정하게 제한하기도 했다. 물소뿔을 일종의 전략물자로 간주해 수출 물량을 통제한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는 수입 물소뿔 대신 국산 쇠뿔을 사용하는 각궁을 사용하기도 했다. 국산 쇠뿔은 뿔 색깔이 희기 때문에 이를 사용해서 만든 각궁은 백각궁이라고 불렀다. 혹은 국산 쇠뿔을 썼다는 뜻에서 향각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흑각궁은 최고의 각궁의 손꼽혔지만 재료 수급 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 국궁 활쏘기에 사용하는 각궁이나 박물관에 남아있는 각궁은 대부분 활쏘기 연습에 사용하는 일종의 습사용 각궁이다. 1929년 조선궁술연구회에서 발간한 《조선의 궁술》을 보면 이미 당시에 습사용 각궁만 전하고 전쟁에 사용하는 각궁은 실물도 없고 제작 전승도 끊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2010년 12월 일본 야스쿠니신사에서 실전용 흑각궁일 가능성이 있는 활이 사상 처음으로 발견되었을 때 언론에서 큰 관심을 보인 것도 이런 저간의 사정 때문이다. 동아시아 삼국 중 가장 활쏘기를 잘한다는 자부심을 지녔던 나라에서 실전용 군용 흑각궁 하나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김병륜 / 국방일보 취재기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객원연구원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유용원의 군사세계] 우리 민족의 대표적 전통무기 - 활과 그 무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