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전쟁이 낳은 비극적 인물 이학구(李學求)

안덕래 | 2008-06-20 19:00:07

조회 6911 | 추천 4 | 다운로드 0

글 작성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제공

이학구 라는 최 고위 공산 포로에 관해 늘 관심 있었는데..

글을 읽다가 문득 떠올라 검색을 해보니..

참 불쌍한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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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http://koreada.com/jboard/?p=detail&code=mbc&id=135&page=3



전쟁이 낳은 비극적 인물 이학구(李學求)



얼마 전 거제도에 다녀왔다. 내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취재를 위해서였다. 거제도는 한국전쟁 시 전쟁포로 수용소가 있었던 곳이다. 360만 평에 17만여 명이 수용된, 세계 최대의 전쟁포로 수용소, 그곳에서 일어난 포로들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 나는 그 잔혹한 폭력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가, 무엇이 그들을 야수로 만들었는가를 취재하고 있다.
역사를 더듬다 보면 늘 흥미로운 인물 한두 사람쯤은 만나게 된다. 이번 취재에서 나의 관심을 잡아 끈 것은 '이학구'(李學求)라는 사람이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1951년 5월 7일 거제도에서 일어난 사건은 단번에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전쟁에 또 하나의 전선이 있다는 것을 알린 사건이었다. 그것은 좀 어이없는 일이기도 했다. 포로수용소장 다드 준장이 76수용소의 포로들에게 납치된 것이다. 포로들에게 포로가 된 포로수용소장!
이쯤에서 새로운 인물이 나타난다. 다드 준장을 납치한 포로들이 맨 처음 요구한 것은 이학구(李學求) 총좌(總佐)를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총좌는 우리 군의 계급 체계로 보면 대령에 해당한다. 공산군의 포로 중에서 최고위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장교들만 수용하는 66 수용소에 있던 이학구는 76 수용소로 옮겨졌고, 이후 미군을 곤혹스럽게 하는 협상을 진행하게 된다.
이 이학구라는 사람은 수수께끼같은 인물이다. 그는 1950년 인민군 2사단의 참모장으로서, 38선에서 개시된 인민군의 최초 공격을 지휘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1950년 9월 21일 낙동강 전선에서 미 제1기병사단에 투항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된 지 6일 만이었다. 그의 투항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남쪽에 고립된 많은 인민군들의 선택과 다르지 않다.
그 후 불과 8개월만에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이학구는 친공포로의 지휘자로서, 미군을 곤혹스럽게 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계급이 높다는 이유로 단지 사태를 원만히 수습하기 위해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두 번 변절해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8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무엇이 그를 또 한번 변절하게 했는가? 내가 만난 몇몇 포로들은 이학구가 투항한 것은 위장이었다고 주장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히자, 인민군 지휘부에서 이학구에게 위장 투항해, 포로들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적의 후방'을 교란하라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투항했을 때의 정황을 보면 위장 투항이라는 것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는 사단장 홍용진(洪鏞鎭) 소장을 권총으로 쏜 후 탈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투항 후 그는 미군측의 요구에 따라, 북한 인민군의 귀순을 종용하는 방송을 하는 등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그는 다시 한번 변절했다. 나는 이학구와 같은 66 수용소에 있었던 현동화(玄東和, 그는 나중에 중립국행을 선택했다)씨를 인터뷰할 수 있었는데, 현씨에 따르면 실제로 이학구는 66수용소에 있으면서 '해방동맹'(일명 '용광로')이라는 친공포로 조직을 지휘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수용소 당국과 접촉하는 데 그가 나서기는 했지만 사실 실질적인 배후는 따로 있었다. 전문일(全文一)이라는 가명으로 수용되어 있던 박사현(朴士鉉)이었다. 소련 공산당원이기도 했던 박사현은 1945년 소련의 대일전, 이른바 조선해방전쟁 시 소련군과 함께 북에 진주한 36명의 한국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중에 미군의 심문에, '남일의 지시로 51년 11월 위장 투항했으며, 자신이 포로조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고 답했다.
박사현의 말은, 북이 이학구를 믿지 못했으며 믿을 만한 다른 사람이 포로들을 지휘해야 한다는 판단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학구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어쨌든 변절자였던 것이다.
이학구를 직접 대면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공산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사람은 아니었다. 점잖고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변절은 커다란 결심을 요구한다. 더구나 이학구처럼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번 변절함으로써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엄청난 도박일 수밖에 없다. 저쪽에서는 여전히 신뢰하지 않을 것이며, 변절자라는 낙인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그는 왜 또 한번의 변절을 했던 것일까? 나는 이쯤에서 프로그램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는 강력한 충동을 느꼈다.
수수께끼는 미국의 문서에서 풀렸다. 미국의 G-2 정보보고 문서였다. 그에 따르면, 이학구라는 거물 투항자를 잡은 미군은 이학구와는 전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학구는 '국군 장교가 되어' 새로운 조국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미군은 그를 소중한 것과 교환할 수 있는 값진 상품으로 생각했다. 그 '소중한 것'이란 개전 초기 대전에서 북한 인민군에게 포로가 된 딘 소장이었다. 딘 소장과 이학구의 일대일 교환! 그러나 이학구의 귀순 의사는 확고하고 명백한 것이었다. 이학구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교환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학구가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다시 갖도록 해야 했다. 이학구에게 의도적으로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푸대접한다. 정보보고 문서는 이학구가 그런 푸대접에 자존심 상해 하고 분노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학구는 결국 미군의 의도대로 다시 한번 변절했다. 그리고 북으로 돌아간 뒤, 1963년 그는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50년 9월의 총격은 자신의 상관과 새로운 희망을 향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고 더 이상 향할 데가 없는 절망의 끝을 의미했다. 어쩌면 그것은 두 번 변절하는 순간에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전쟁이 낳은 한 비극적인 인물은 그렇게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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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 ㅋㅋㅋ님 김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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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운형의경우 현제까지 밝혀진바로는 김정일에의한 살해입니다
    김정일의 지시를받은 좌익에의해 살해된것이죠
    뭐 북한에서는 여운형을 아직도 추대하고 뭐하고하면서 진실을 가리고있고
    극우분자가 살해한것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진실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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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하....참.......소설같은 일이 당연히 일어나던때의 또 한분의 삶이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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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덮어쒸우고 억떼기 쓰는 것은 좌빨이들을 못따라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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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운형도 그동안은 극우파가 암살한걸로 알고 있었는데....<br>
    남한내 좌익이 암살한거라고 여윤형 딸이 인터뷰 하더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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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사람뿐이겠습니까..김일성이랑 박헌영 그인간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고향이나 아끼던 사람들 잃고...전쟁으로 인한 사상전으로 죽은 사람이 몇명입니까 ㅜㅜ진짜 분단이 안됐으면 많은 사람들이 살거나 평온한 삶 살았을텐데 그것을 빌어먹을 김일성 박헌영 콤비와 6.25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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