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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육군 공수사단, 상륙사단, 산악사단 창설 비화

육해공군 작성자: 큐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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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12-07 16:37:50

간단하게 내용 요약하자면

1. 육사 8기 출신인 이재전 준장이 67년 1군 작전참모 시절에 구상한 계획

2. 5사단을 공수사단, 2사단을 산악사단, 11사단을 상륙사단으로 구상

3. 공수사단은 미국의 공수사단, 산악사단은 미 알래스카의 산악 및 극한지 훈련을 참고,
상륙사단은 한국 해병대 역할에 대간첩작전을 겸함


이하 회고록 전문

그때그이야기


제1話 溫故知新<83>정예 야전군 건설 주창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나는 1967년 야전군 작전참모 시절 이스라엘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 충격적인 6일전쟁을 겪으면서 감히 ‘이스라엘군보다 더 정예 야전군’ 건설을 주창했다.

미국의 해외파병 군사전략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략공군을 중심으로 한 고도의 정밀기술 전력은 미군 중심으로 운용하고 지상군은 군사원조를 바탕으로 원주민 군대 위주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시 미국의 대외군사정책 방침의 영향을 받아 육군이 건설된 결과 육군 20개 사단 전부가 보병사단이었다.

그런데 6일전쟁은 한국군에 일단 유사시 보병만으로는 승리를 담보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군원(軍援)을 받는 처지에 미군 동의 없이 우리 마음대로 병과(兵科)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작전참모로서 서종철(徐鐘喆·육사1·대장 예편)제1군 사령관에게 군사령관 직권으로 보병 위주의 사단을 불식하고 3개 특수사단을 지정토록 건의했다.

내가 이런 건의를 올린 까닭은 부대 편성은 미군의 동의를 얻어야 하지만 연구 개발은 군사령관 직권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1군에 공수사단·산악사단·상륙사단의 세 가지 특수사단을 지정, 교리와 편성장비 등을 연구 개발케 해 자주국방의 토대를 마련토록 했다. 물론 서종철 대장의 결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조문환(曺文煥·육사7특·중장 예편·작고)장군의 5사단을 공수사단으로, 김학원(金學洹·육사5·중장 예편·작고)장군의 2사단을 산악사단으로, 그리고 이세규(李世圭·육사7·준장 예편·작고)장군의 11사단을 상륙사단으로 각각 지정해 교리와 편성장비 등을 연구 개발케 했다. 내가 전투용 스키를 타본 것도 2사단에서 개발한 장비를 가지고 탄 것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지정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문환 장군이 공수특전단장을 지냈기에 조장군이 지휘하는 5사단을 공수사단으로 지정했고, 2사단은 부대가 험준한 산악지대에 있어 자연스레 산악부대로 지정했으며, 11사단은 바다를 끼고 있어 대침투작전을 겸해 상륙사단으로 지정했다. 사실 해병대도 상륙이 끝나면 역할이 육군인데 육군이라고 해서 상륙을 못하라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11사단은 봄·가을 1년에 두 번 대간첩 침투작전을 겸해 상륙훈련을 하게 됐다.

그런데 이 특수사단들은 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계기로 희비가 엇갈렸다.

김학원 사단장의 경우 내가 2사단을 산악사단으로 지정하면서 미 알래스카에 있는 미군 산악 및 극한지 훈련 시찰을 건의해 울진·삼척 사건 당시 국내에 없었으나 무공을 세운 작전 성과가 평소 부대훈련을 잘 시켜 얻은 결과로 평가받아 사단장 직무대행인 부사단장에게까지 무공훈장을 수여하게 됐다.

반면 후방지역 경계 책임을 지고 있던 11사단의 경우 초기 작전에 실패하고 적이 나타날 때마다 병력 건제(建制)를 무시하고 축차(逐次) 투입을 하는 바람에 당시 육사7기 동기생 중에서 선두로 장군에 진급한 이세규 사단장은 끝내 소장으로 진급하지 못한 채 예편했다. 당시만 해도 준장을 사단장으로 내보내 공을 세우면 소장으로 진급시키는 인사관행이 유지될 때여서 사단장들이 서울만 쳐다보고 작전훈련을 게을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작전참모 시절 그런 폐단의 시정을 육본에 건의했다.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군보다 더 정예 야전군을 만들기 위해 이종렬(李鍾烈·공병3·소장 예편)장군을 인솔자로 한 장교단의 이스라엘군 시찰이 진행됐다. 그런데 시찰단이 가서 보고 느낀 점을 보고서로 제출했는데 그 가운데는 ‘참모총장도 나무의자에 앉아 집무하는 검소한 이스라엘군의 정신을 본받자’는 건의도 있었다. 그 때문에 ‘나무의자’가 이스라엘 정신으로 확대 해석돼 우리 육군의 총장과 참모부장들의 의자가 나무로 바뀌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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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

  • 천지황 2008-12-15 추천 0

    79년군번이며 9연대 출신 입니다.당시 11사단 굴지리 유격장에 함정 하선망이 설치된것이 있었고,헬기 오르는 사다리가 있었지요.이글을 보니 이제서 왜 상륙사단이라 했고 그런 연습을 했는지 알겠네요.79년 가을 대간첩 작전에 나가서 박통이 돌아가셔서 부대 복귀했었지요.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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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쇠발바닥 2008-12-13 추천 0

    양평 5사단은 공수사단.... 물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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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眞波 2008-12-13 추천 0

    아이고 삼백 선배님 그냥 나는 70년대 초 군~에서 그~시기를 300일 동안.^^ 이러시면~ 후배들이 오해가 없지라~ 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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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백-1 2008-12-10 추천 0

    휴~ 아이핀과 하는 크린캠페인인지 뭔지에서 멋모르고 눌럿다가 탈퇴처리되서 한참 헤메다가 오늘에사 겨우 재가입이 &#46095;군요.그래서 삼백-1 이 &#46095;읍니다.잘못크릭해서.골병들었다는.ㅎㅎ 예전에 5 사단이 공수사단..2 사단이 산악 사단은 맞는대..11 사 가 상륙사단은 모르겠네요..1 군 지역에 교육사단이 2 사..11사..27사 로 기억하는대..그때 FTX 를 11사하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5사단은 20사에서 월북사고 나면서 사단이교체되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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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보공유 2008-12-09 추천 0

    5사단 출신 외삼촌께서 공수 훈련 받기 싫어 발에 일부러 봉와직염 걸리게 해서 주둔지 경계로 남았다는 이야기 들었죠..그 당시는 전 사단이 공수훈련 받던 시절이라...공수마크 달고 다녔다고 하시더군요...막 공수마크 달고 휴가나가면 공수부대원들이 공수마크 달고 어리버리 하지 말라고 막 뭐라하고 그랬다던데...사실 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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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랑 2008-12-08 추천 0

    직장 상사 중에 한분이 20연대 출신으로, 79년 대간 작전을 회식 때 말씀 많이 하셨습니다. 이 분이랑 같은 시기 근무하셨군요. 펀치볼로 출동했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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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wokone 2008-12-08 추천 0

    저도 체리코크 아버님 당시인 77년부터 79년까지 11사 20연대 본부 통신대에 있었는데 공수연대를 하셨다는 말은 처음듣네요.저희 연대에서 제가 있을 당시에 강능인가 묵호에가 상륙훈련을 하고 돌아온 기억은 있습니다.그당시 연대장님이 임병화 대령님이었는데
    박통 돌아가시기 바로 전인 79년가을에 대간첩작전 나가서 공비는 하나도 잡지못하고 매복중 아군 오인사격과 크레모아를 잘못 설치한 상태에서 격발하는바람에 여러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한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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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리코크 2008-12-07 추천 0

    저역시 11사단을 나왔고, 저희 아버님도 11사단을 나오셨습니다(78년 군번) 20연대 나오셨는데, 그때당시 20연대는 사단을 공수사단으로 개편한다 어쩐다 하셔서 20연대가 시범적으로 공수연대를 하셨다고 들었는데요...이건 또 무슨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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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빠진골병 2008-12-07 추천 0

    지금의 홍천 북방면 하이트공장 옆, 홍천강변에 상륙훈련장이 있었드랍니다. 지금도 지나다 보면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더군요. 시멘트 구조물로 만든 LST후미, 하선망,등등......옛날에는 묵호항 앞바다에서 빙빙 돌다가 상륙훈련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저는 상륙장에서 주특기 훈련 받으며 라면만 끓여 먹었던 기억이~~ 이상 화랑부대 83년 1월 군번이었습니다! 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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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랑 2008-12-07 추천 0

    이런 비화가 있었군요, 5사단 출신인 분이 계속 공수훈련만 시켜 차라리 월남을 지원했다는 말... 화랑부대가 예전에는 상륙훈련을 했다는 말이 아귀가 이제서야 맞아 떨어지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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