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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한이 어린 사이판 전쟁유적지(1)

전사적지_답사기 작성자: 부국강병조국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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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7-04 09:45:51

                                       사이판 한국인 추모비와 망국인 서러움

 한반도에서 남쪽으로 약 3000Km 떨어진 사이판! 초록빛 바다, 새하얀 모래, 원시림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 섬에는 아직도 곳곳에 태평양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다.
 
▶마리아나 역사와 망국노(亡國奴)의 서러움
 마리아나제도는 스페인 탐험가 마젤란이 1521년 세계 일주항해를 하다가 처음 발견했다. 괌(Guam), 사이판(Saipan), 티니안(Tinian) 등 15개의 섬들이 늘어선 이곳을 스페인 왕비 마리아 안나(Maria Anna)의 이름을 붙였다. 마리아나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괌은 19세기 미국과 스페인 전쟁 결과 미국영토가 되었다.
 그 후 마리아나 섬들을 독일이 사들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승전국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이 이 지역을 차지했다. 일본정부는 “남양청”을 만들어 민간인들을 대거 이주시켰고 미래 전쟁에 대비하여 각종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미국영토인 괌을 기습 공격하여 쉽게 점령한다. 이때부터 약 4년간 이 섬들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변했다. 그리고 나라 없는 서러움을 안은 한민족은 이곳 남양군도(마리아나제도)로 끌려와 일본군 총알받이로 내몰렸다.                
                                                          

                         
                        마리아나 제도 요도(좌)                     사이판 만세절벽(우)

 

▶한국인위령탑과 고향을 못 잊는 영혼들
 사이판은 남북 길이가 20Km, 동서 폭은 2∼10Km인 제주도 1/10크기의 작은 섬이다. 이곳에서 가장 큰 도시인 가라판(Garapan)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한국인 희생자 추모공원! 강제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와 숨진 많은 한국인들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졌다.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는 추모탑 꼭대기의 비둘기 부리.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나마 꼭 다시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형상을 의미한단다.
 “남의 것 빼앗은 적 없는 어진 민족의 영혼들! 원치 않는 전쟁에 떠밀려 돌아오지 못할 땅에 뿌려지다. 응어리진 한은 켜켜히 산호로 쌓이고 서러운 순백 포말로 남았다. 칠천 오백 리 어머니 땅에서 온 후예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이 돌을 세웠다.”라는 기념탑 추모시는 여행객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1947년 일본 대장성 문서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소속 한국인은 363,500명, 해외징용자 1,390,000명, 국내 강제근로동원인력이 약 600만 명에 달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매일같이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것이다.
 


                       
                                                  이판 한국인 추모비

 

▶태평양전쟁과 사이판의 전략적 가치
 전쟁 후반기인 1944년 6월 15일부터 7월 16일까지 이 작은 섬을 두고 미군과 일본군 20만 명이 격돌했다. 미군은 일본 본토점령을 위한 중간기지로 반드시 사이판을 점령해야만 했다. 일본군은 동남아지역 절대 국방권의 선단이 바로 마리아나 제도였다.
 미군은 이런 전략요충지 확보를 위해 병력 11만 명, 함정 800척, 항공기 1,000대를 투입했다. 당시 미군 B-29폭격기 항속거리는 5,600Km, 사이판에서 도쿄까지는 불과 2,400Km. 이 섬에서 출격하면 일본본토를 폭격하고 여유 있게 돌아 올 수 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약 10만 명의 병력을 마리아나제도에 배치하고 견고한 요새를 구축했다. 이런 진지공사는 빠짐없이 강제징용 한국인들이 동원됐다.
 

 

▶일본군 최후 사령부와 만세절벽
 한국인 위령탑 부근에는 사이판전투 당시의 일본군 사령부가 있다. 해안가 절벽의 자연동굴과 콘크리트진지를 활용한 견고한 요새다. 지휘소내부는 상당히 넓었지만 미군포격으로 50cm 두께의 진지 옆구리가 뻥 뚫려 있다. 특히 이곳은 일본군사령관 사이또 중장이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요새지 뒷산에는 한국인 위안부 감금시설이 있었지만 현재 입산로는 폐쇄되어 있다.
 

 

                             

                                          사이판의 일본군 최후사령부


  일본군의 악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령부 앞 해안의 80m 높이 만세절벽(Banzai Cliff)은 만여 명의 일본군과 민간인들이 바다로 몸을 던진 곳이다. 일부 원주민과 한국인들도 발목에 줄이 묶인 채 강제로 자결을 강요당했다. 군국주의의 잔인한 행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이다. 절벽 위 광장에는 일본군 충혼비가 즐비하다. “자고나면 위령비 하나가 생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과거사 미화가 심하다고 한다. 그러나 억울하게 죽어간 한국인 추모비는 단 한 개도 없다. 안내자 K씨에 의하면 이곳에 들리는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한 항의표시로 껌을 일본인 충혼비 뒤에 슬쩍 붙인다고 했다. 정말 돌비석 뒤에는 덕지덕지 붙어있는 껌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인 추모비 뒷면(하얀 색갈이 껌딱지 표시임)

 

Tip: 태평양전쟁 이후의 사이판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미국정부가 사이판과 인근 섬들을 포함한 북마리아나 연방을 결성하여 통치하고 있다. 사이판에는 가라판을 비롯하여 9개의 마을이 있는데 대부분 필리핀해에 접한 서해안에 집중되어 있다. 섬 인구 4만 5천 명 중  한국 교포는 3000여 명에 달한다. 
 


댓글 3

  • best 이슬이 2018-07-08 추천 1

    올해 같은 장소를 방문했는데 저희 가이드는 중국인들이 붙이 껌이라고 하더군요.

  • 부국강병조국통일 2018-07-09 추천 0

    여러 이야기가 있을 수 있는데
    어쨋던 잔인한 일본군들의 행태른 꾸짖는 다른 민족들의 의사표시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곳 주변 수많은 추모비 중 일본정부가 태평양전쟁 발발을 참회하며 희행된 한국인, 원주민, 타민족 국민들을 위해 건립한 표시석은 단 1곳도 없습니다

    댓글 (1)

    이슬이 2018-07-10 추천 0

    네, 말씀하신 뜻 잘 알겠습니다. 저희도 한국인 추모비에서 묵념하고 왔습니다. 올려주신 좋은글들 잘 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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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이 2018-07-08 추천 1

    올해 같은 장소를 방문했는데 저희 가이드는 중국인들이 붙이 껌이라고 하더군요.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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