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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3 진지의 대전차지뢰 사건

  작성자: 김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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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2-09 20:04:51


이런 것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씁쓰레한 기억인데 아래 "211호컨트롤러" 님이 올려주신 그림을 보니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군요.

  

신읍리에서 헬렐레 고개를 넘어 철책선 으로 가는 길에  Q3라고 부르던 주 방어진지가 있었습니다.

이 진지를 훼바(FABA)라고 불렀는데 이 용어가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진지는 전쟁이 발발하면 투입되는 진지이므로 평상시에는 경계차원에서 우리 3대대 10중대의 1개 분대 병력이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시멘트 불럭 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작은 막사에서 생활했지요.

그 숙소는 한 쪽에 아궁이가 붙어있는 작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아직도 눈이 녹지 않은 3월 초의 어느 날 밤,

잠을 자던 분대장이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떠 보니 누군가가 작은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녀석이 보초는 안서고 아궁이 불을 쬐러왔군!”

그는 며칠 전에 전입한 일병이었죠. 

분대장이 그를 나무라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여는 순간 “착!!”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일병이 M-1소총을 당겨 격발되는 소리였는데 실탄은 발사되지 않은 것이죠.

그는 도망갔고 분대장은 잠자는 분대원 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비상! 모두 일어나!!“

 그 순간에 그 일병이 아궁이 속에 던져 넣은 대전차 지뢰가 폭발하였죠. 

작은 막사는 산산이 부서지고 병사들은 사방으로 날아갔습니다.

 

<기적의 생존>

기적이랄까... 어쩌면 대전차 지뢰의 특성이나 폭발지점의 조건 때문인지... 

날아간 병사들은 아무도 후방으로 후송을 가지 않았고 지대(대대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는 것으로 끝냈습니다.

사고를 낸 일병은 근처 언덕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고요.

  

며칠 후, 우리는 철책선에 투입되기 위하여 야간행군을 하며 그 막사가 있던 자리를 지나갔습니다. 정말 산산조각이 났더군요.

 

그제 먼저 행군로를 정찰하고 온 향도 정병장이 말하더군요.

“그 대전차 지뢰를 넣은 놈 말이야,”

“저기 저 언덕에 그때까지 그냥 매달려 있었어,”

 “헌병대가 조사를 마쳐야 풀어주는 거라고 하던데?”

“그 녀석의 발아래에는 분해된 M-1 소총이 널려있었다고 하더구먼.” 

  


나는 3년간의 군대시절에 죽고 다치는 병사들을 여럿 보아왔습니다.

철책선의 시계확보를 위하여 제초작업을 하다가 소대장이 잘 못 누른 클레모어에 여럿이 죽는 것도 보았고,

 처음으로 보급된 나일론 섞인 검정색 양말 한 켤레 때문에 말다툼을 벌려 동료를 쏘아죽이고 수류탄으로 자살하는 사건도 목도하였습니다.

 

생명력의 절정에 달한 싱싱한 젊음들이 말도 안 되는 사건으로 스러진 기억은 지금도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제대 후에 읽어본 이문열의 “새하곡”에 병사의 자살이 언급되는데 거기에서

 “왜? 병사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가지?” 하는 대대장의 혼잣말에 주인공인 소대장은 “ 절망 때문이지요” 라고 답합니다.

 

글쎄요... 절망 때문이라....

나와 한 침상을 쓰던 똑똑한 신참병이 내가 휴가를 떠난 다음 날 영점사격장에서 갑자기 일어나 자기 가슴에 카빈총을 당겼습니다.

그는 내가 휴가를 떠나기 전에 진지한 표정으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였는데 원래 센스가 없고 나 스스로의 군대생활도 힘들었기에 그의 말을 무심히 넘겼던 것입니다.

(이 병사에 대하여는 언젠가 글을 정리하여 올리고 싶습니다만) 아마도 이 경우에는 “절망” 이라는 이유가 해당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내가 겪은 군 생활을 반추해보면 절망보다는,

대전차지뢰 사건에서 보듯이,

군대에서 유구히 보존되는 폭력적인 문화로 인하여 어느 개인이 군대에 입대하기 전부터 지녀온 나쁜 특성이 폭발되기 쉽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 짜투리 글 *********************

 

1.언급한 사고병이 M-1 소총을 쏘려 했으나 발사가 안 된 것에 대하여는 수긍이 갑니다.

  내가 갖고 있던 M-1 소총도 혹한기의 사격장에서 발사가 되지 않은 경우가 있었으니까요.

  총이 얼어붙어서 총을 바닥에 세운 후 발로 노리쇠손잡이를 밟아 후진시키는 강추위에는 공이가 짧아져 

  총알을 충분히 때리지 못하는 총이 여럿 있었습니다.

 

2. 이러한 경험을 했기에 훗날 견본으로 들어온 M-16 소총을 분해하여 보았을 때 관심을  가진 것 중의 하나가 노리쇠에 

   삽입된 공이의 구조였습니다.

    M-1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더군요.

  





댓글 22

  • best 백학산 2018-02-10 추천 1

    저 에게도 가슴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진지 작업 나간 병사가 수류탄으로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는데 토요일만 되면 그 병사의 어머니가
    면회를 와서 면회신청을 하는 것 있었죠.

    몇 번을 설명을 해서 돌려 보냈지만 또 다시 찾어오곤 했습니다.
    다시 차근차근 설명을 드렸지요.
    본인도 다 안 답니다.
    하지만 집에 있으면 여기에 오면 아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토요일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문산행 버스를 타게 된다고 울먹였습니다.

    당시에 전방 진지작업에 투입된 병사들의 생활은 참으로 열악했습니다.
    영화에서 보던 2차대전 당시 포로 수용소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 2708 2018-02-12 추천 0

    놀랄 일이군..
    내가 90년도 군번이고 사단 사령부에서 근무해서 사단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알았는데 윗글과 같은 일은 과장된 소설일듯.

    댓글 (4)

    시리우스 2018-02-12 추천 0

    80년도 군번이고 윤일병이 근무했던 곳 입니다.
    처음에 자대배치되어 소대 점호를 가니 바로 위 고참은 말년병장 발을 씻어주고 있고 점호는 고참 상병이 하더군요~내무반 말년 뻬치카 뒤에는 소주박스가 3-4개 쌓여있고요~
    당직 사관은 밖에서 별보며 담배만 피고 있고..점호할때 들어가면 사병에게 구타당하기 일 수 인데 장교가 병에게 맞았다고 하소연도 못하고 있다가 병출신 중대장 부임하자 내무반 소주가 사라지더군요~.

    영락대제 2018-02-12 추천 0

    2708님..사단에서 근무하면 모든걸 다안다구요?...혹 사단장님 이셨습니까?...90년도 군번이라니.아닌듯한데..중대본부에 있어도 중대에 일어나는 일 다 모릅니다..특히 구타관련일은 요..70년대엔 군이 엄청 폐쇄적이었습니다..20년이상 차이가 나는 군생활에 자신이 경험치를 들이대면 오류지요..어찌되었건 한참 선배분의 글에 과장된 소설이라니요?...결례입니다....

    김바사 2018-02-12 추천 0

    또한 이 사건은 70년대 초반의 사건임을 기억해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

    김바사 2018-02-12 추천 0

    2708님,
    제가 쓴 글은 좀 더 훗날에 저 스스로 반추해 볼 글이기 때문에 과장법은 극히 절제하는 편입니다.
    과장이나 양념을 넣게되면 제 기억이 변형되어버릴 염려가 있지요.
    다만 각기 대목에 들어나는 나의 감정적인 느낌은 주관적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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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락대제 2018-02-10 추천 0

    선배님의 글을 읽다보면..옛추억이 떠오르기도 그 당시 의문점도 이해가 되기도 하고..이래서 역사가 중요한것 같습니다..언급하신..사건은 병영에 사고사례집 이란 책자로 보급되어..당시 근무중인 병사들의 정신교육으로 또,사고예방교육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제가 복무했던..사방거리축서쪽으로 쌍용댐가기전..인접보름달 사단 으로 가는 고개길자락에..한국전쟁전 민간인이 거주하던 집이 몇채있습니다..아궁이에 깨진 무쇠솥에...50년대 사진으로나 볼수있었던 그 집을 보면서..
    여기서 거주하던 분들은 어찌 살고있을까?,,아니면 이미?...이런 궁금증을 가진적이 있었지요.
    아마 지금도 단결포 윗자락 그곳은 그 집이 있을겁니다.. 쌍용댐에 물빠진 적이 잇었는데..한국전때 쓰던 모신나강 소총이 총열과 개머리판 일부가 남은 채로 발견되어.연대 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지요...선배님 글을 보면..제2의 고향이 되버린 그곳의 추억과 소중한 경험을 떠올려 봅니다...감사합니다..

    댓글 (2)

    영락대제 2018-02-11 추천 0

    제가 한참 후임이니..저때는 사고사례집을 중대단위로 전파하여 정신교육에 활용했었습니다..주로 한국전부터..주욱~~별개 다 있습니다.. 유골을 말씀하시니..저도 경험담을 말씀드리자면,, 주파리 검문소에서 505쪽으로가다보면..제가 근무할시에 군단 특공여단 예하의 정찰대가 주둔했었습니다..그 주변 산자락에서 유선통신망가설 작업중..한국전때 전사한 유골을 대략 4구 정도 수습했었습니다..연대에서 나와서 1차조사하고 사단에서 나오고 육본에서도 나오더군요..
    울컥치민것이..육본에서 나온분들이 수습하는데.. 2구의 유골이 작전참여한 대부분의 병력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왜냐면...2구의 유골이 겹쳐서 발굴 수습되었는데..아래분은 국군.윗분은 인민군으로 추정되었습니다..참호에서 전투중 서로 찌르고 총탄에 맞아 포개진 채로 ,,묻혀버린 상황이더군요..
    주변에 널린 탄피와 인민군 물품..유류품이 상당히 많이 나왓고..전 그 당시 인민군 철모를 실물로 처음봤었지요...인민군도 철모를 썼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지요..영화나 드라마보면.죄다..헝겊모자에 붉은 별만 붙여서..ㅎ..피의 역사가 베ㅓ있다는 말씀..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당시 발굴된 유류품은 지금도 연대 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김바사 2018-02-10 추천 0

    영락대제님
    그 사건이 사례집으로 나온 줄은 몰랐습니다. 놀랍네요.

    금성으로 가는 통문에서 바라보아 좌측 능선아래가 옛날에 밤성골이라는 동네가 있던 자리였다고 합니다.
    사단의 방어섹터는 그 밤성골 위 501 벙커에서부터 시작했지요,
    이 근처를 지나는 길이면 혹시 구들장 자리라도 남은 것이 있는지 살펴보곤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대구포앞을 흐르는 냇가 갈대밭속에 철모를 쓰고 누워있던 백골입니다.
    철모는 게딱지처럼 얇아져 있었는데 근처 양지바른 곳에 모셨지요.
    사방거리위 덕비끼네 계곡에서 근무할 당시에도 2구의 백골을 발견하여 언덕위에 다시 묻어준 적이 있습니다.
    성서에 쓰여있는 말씀이던가요... 대지가 받아드린 피를 다시 내어놓는다.... 피의 역사가 이 땅에 배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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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을가다 2018-02-10 추천 0

    박정희 시절에는 폭력이 심했는데 오죽했으면 김XX라는 놈이 제대할때 패죽일려고 잡으러 갔던것도 기억이 납니다.분위기가 흉흉해서 그랬는지 언제 도망간지 모르게 도망가고 없더군요.

    댓글 (1)

    김바사 2018-02-10 추천 0

    비단 박정희 시절 뿐이겠습니까
    그 시절에는 폭력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자체가 지금과는 달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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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을가다 2018-02-10 추천 0

    아주 친하게 지내던 동기 두놈이 장난치다가 오발해서 복부 관통상으로 한녀석이 그자리에서 사망한 사건이 있었죠.아마 같이 장난치다 동기를 사살한 녀석은 죽을때까지 가슴에 담고 살겁니다.
    하여간 총으로 장난치는게 아닌데 아주 친하게 지낸 놈들이고 짠밥도 먹을만큼 먹어서 밑에 후임들이 막을수있는 입장도 아니었고 하여간 사건이후에 분위기가 엄청났습니다.
    어떻튼 죽은 놈도 딱하지만 살아있는 녀석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녀석은 영창갔고 중대장,대대장은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였죠.얼마나 친하게 지냈던지 죽은 녀석의 부모님도 사고친 녀석을 알고 계셨는데.....

    댓글 (1)

    김바사 2018-02-10 추천 0

    딱한 일입니다.
    제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겨우 양말 한 켤레의 다툼으로도 사고나 났지요.
    길을가다님의 경우에는 서로 아무런 악의가 없이 장난을 친 결과이니 참 허망합니다.

    제가 전입을 간 직전에 철책선 초병이 유탄발사기를 갖고 장난을 치다가 자기 눈에 발사를 하여 죽어간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눈에 박힌 유탄이 폭발을 하지 않았는데 이 유탄을 강제로 폭발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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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眞波 2018-02-10 추천 0

    김선배님의 군시절 추억담 속에서도 절해고도에 갇혀버린 빠삐용의 땀 내음이 조금은 묻어난다 생각했었습니다.
    저 역시 영남출신 촌놈이었지만 60트럭의 일으킨 뽀얀 먼지길 넘어 첩첩산중 강원도 두메 산골을 돌고 돌아 도착한 보충대에서 어린 나이에도 "아~~"하는 탄식을 한 기억이 아직도 또렸합니다. 어려서 부터 인성과 남을 배려하는 사회성 교육을 젊은 부모들이 했으면 합니다.

    댓글 (1)

    김바사 2018-02-10 추천 0

    풍산리에 있던 연대본부에서 오전에 출발하여 배치받은 신읍리의 3대대까지 산속을 종일 걸어갔습니다.
    그 경험을 "자대가는 길" 이라는 제목으로 여기에 올렸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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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학산 2018-02-10 추천 1

    저 에게도 가슴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진지 작업 나간 병사가 수류탄으로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는데 토요일만 되면 그 병사의 어머니가
    면회를 와서 면회신청을 하는 것 있었죠.

    몇 번을 설명을 해서 돌려 보냈지만 또 다시 찾어오곤 했습니다.
    다시 차근차근 설명을 드렸지요.
    본인도 다 안 답니다.
    하지만 집에 있으면 여기에 오면 아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토요일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문산행 버스를 타게 된다고 울먹였습니다.

    당시에 전방 진지작업에 투입된 병사들의 생활은 참으로 열악했습니다.
    영화에서 보던 2차대전 당시 포로 수용소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댓글 (2)

    眞波 2018-02-10 추천 1

    그 모정에 눈물이 울컥하네요. 평생을 아들을 생각하며 우울하게 사셨겠군요..

    김바사 2018-02-10 추천 0

    정말 가슴아픈 이야기네요.
    저도 군시절에서 마음 아픈 이야기가 많은데... 여기에 올리기에는 너무 어두운 글이라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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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복 2018-02-09 추천 0

    여기는 그남아 공개되어 다행이지만
    북한의 사건사고는 부지기수입니다.
    공개가 안되고 다 묻혀버려서 그러지요.
    -
    1980년 말 레성강다리 건설때 한개 대대가
    다리가 무너져 죽어-

    댓글 (1)

    김바사 2018-02-10 추천 0

    이민복님,
    제가 이따금 여기에 올리는 ... 제가 경험한 사건들은 그 당시에도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시대는... 박정희 시대뿐아니라 이승만의 시대도 많은 억압이 있었는데 이는 정치체제의 문제라기 보다는 앞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속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에서는 그 억압이나 통제가 일종의 상식이었지요.

    그에 비하면 이 시대는 참 많이 밝아졌지요. 감사한 일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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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복 2018-02-09 추천 0

    젊었을때 한순간이 자기와 남을 날려보낼 수 있네요.

    평시 그러지 못하게 잘 관리하고 다독이는 것이

    자기와 남을 지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잘 참고하고 갑니다.

    댓글 (2)

    이민복 2018-02-10 추천 0

    옳은 말씀!
    나쁜습성이 나타낼 확율을 줄일 수밖에요.
    -
    노르웨이같은 최고의 좋은 인간사회에도
    섬에 간 학생아이 수십명을 총으로 죽이는 세상이니까요..

    김바사 2018-02-10 추천 0

    예,
    제가 글의 끝말에서 하고싶었던 말은 문제를 일으키는 인간의 속성은 지도나 관리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폭력이나 잔인성에 대하여 어떤 ... 숙명론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개개 인간의 속성은 타고나는 것이며 일생을 통하여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대가 밝아서 어느 개인의 나쁜 속성이 발현되는 기회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 없앨 수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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