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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슬픈 전설’, 재일동포 야구단(계속)

  작성자: 전경179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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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03-25 14:38:17

히로시마 토요카프 시절의 김기태. 그의 패기있는 투구는 고교시절에도 같았다

5년 전 동포팀 선수로 참가한 바 있는 신 코치는 전해 성적을 보며 불안했다. 그도 그럴 게 전해 동포팀은 16전 5승6무5패를 기록하며 역대 모국방문팀 가운데 가장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경비 문제로 2년간 공백기가 있었다지만 이전 10회 대회까지 항상 우위에 있던 동포팀이었다.

만약 2년 연속 부진하기라도 한다면 “재일동포팀도 별 게 아니다”는 혹평은 둘째 치고 “약체 선수들이 중심이 된 모국관광단”이라는 비아냥이 쏟아질 게 자명했다. 거기다 더 큰 문제는.

“감독님. (김)기태의 오른손 검지가 부상인 것 같습니다. 손가락이 퉁퉁 부었습니다. 개막전 등판은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습니다.” 신 코치의 보고를 받은 한재우가 양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큰일이었다. 팀의 에이스가 부상이라니. 모국방문에 들떠 밤낮없이 투구연습을 할 때부터 말렸어야 했다. 서울 중앙고와의 개막식이 당장 모레인데.

“신 코치. 장계록을 개막전 선발로 준비시키게.” 한재우는 그렇게 말한 뒤 모든 역량을 타선에 집중토록 했다.

12일 서울운동장(동대문야구장)에서 거행된 ‘제 12회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 환영대회’ 개막식과 1차전 중앙고와의 경기를 보기 위해 만원관중이 입장했다. 두 팀은 6회까지 0-0 팽팽한 접전을 벌이며 투수전의 백미를 선보였다. 그러나 7회초 동포팀 5번 타자 김현조가 3점 홈런을 치며 균형이 무너졌다. 김기태의 공백을 타력으로 극복하겠다던 한재우의 계획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중앙고는 예상보다 강했다. 7회말 4번 이종도와 박형규, 김근후 등이 맹타를 터트리며 장계록을 일시에 무너뜨린 것이다. 결국 점수는 3-4 동포팀의 패배로 끝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야구관계자들과 기자들이 싸늘한 눈빛으로 동포팀을 바라봤다. 13일 성동고와의 경기에서 12-0 대승을 거두며 체면치레를 하는가 싶었지만 역시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해선 8월 15일 광복절에 벌어질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와의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당시 초고교급 투수 유남호가 버틴 선린상고는 고교최강팀이었다. 그해 전국대회 3관왕에 올랐다. 여기다 동포팀이 15일 더블헤더를 치러야 하는 것도 악재였다. 오전에 서울 장충고와 대전한 뒤 오후 선린상고와의 경기가 예정돼 있었다. 최악의 스케줄이었다.

1987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방한한 한신 타이거즈의 히야마 신지로(한국명 황진환, 사진 가운데)가 한재우 감독(맨 왼쪽)으로부터 지도를 받고 있다

에이스 김기태, 부목을 떼다

15일 동포팀은 첫 경기서 장충고를 4-1로 이겼다. 출발이 좋았다. 벤치 분위기도 밝았다. 그러나 선린상고 에이스 유남호가 몸을 풀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돌변했다. 그의 공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남호의)공이 아주 좋았다고. 직구가 돌덩이 같았네. 속으로 ‘아, 이거 힘들겠구나’했네.” 한재우의 회고다. 그때였다.

“감독님, 제가 나가겠습니다.” 선발 오더를 짜던 한재우가 고개를 들었다. 김기태가 서 있었다.
“뭐라고?”
“저를 선발투수로 기용해주십시오. 자신 있습니다.” 김기태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과 몸은 별개다. 마음의 자신감이 몸의 훼손을 부를 수 있다. 한재우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부목을 대고 압박붕대로 고정시킨 김기태의 오른손 검지가 눈에 들어왔다.
“자네의 의지는 높게 평가하네. 고맙네. 하지만 무리하게 등판했다가 영원히 손에서 공을 놓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하게. 완벽한 컨디션일 때 던져도 괜찮아.” 한재우가 김기태의 등을 두들겼다.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군요.” 김기태가 오른손 검지에 대고 있던 부목과 압박붕대를 뗐다. “감독님, 전 모국에 관광하러온 게 아닙니다. 제발 출전시켜주십시오.”

김기태가 선발을 자청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승부욕이 강하고 팀의 에이스라는 책임감 때문도 있었지만 스탠드 어딘가에 있을 친척들에게 자신의 투구를 선보이고 싶었다.

“여관 주인이 날 불러. 김기태 큰아버지라는 분이 찾아왔다는 거야. 밖에 나가니까 어느 노인네가 생닭을 한 마리 손에 쥐고 있지 뭔가. 깜짝 놀라서 물으니까 ‘조카 몸보신 해주려고 갖고 왔다’는 거야. 그걸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나진 않네만 기태는 그걸 부끄러워하기보다 고맙게 받아들였네. 일본에서 차별에 시달리다 한국에서 비로소 따뜻한 정을 느낀 게지.”

김기태는 공이 아니라 혼을 던졌다. 8회말 2사 정장헌에게 볼넷을 내줄 때까지 선린상고를 상대로 퍼펙트게임을 연출했다. 유남호의 1실점 완투와 9회말 동포팀의 실책으로 1-1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시종일관 동포팀이 리드한 경기였다. 그제야 한국야구관계자들 입에서 “역시 재일동포팀”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김기태는 16일 성남고와의 경기에도 선발 등판해 5안타 1실점 완투승을 거뒀다. 놀라운 건 그의 완투가 17일 경기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리할 이유라도 있었을까. "3일 연속으로 친척들이 시골에서 올라왔기 때문"이라는 게 당시 김기태가 밝힌 자진등판의 배경이었다.

20일 서울시리즈 최종전에서 선린상고와 재대결을 펼친 동포팀은 김기태의 3피안타 1실점 호투로 3-1 승리를 거뒀다. 마침내 한국 고교최강팀을 꺾은 것이었다. 이후 지방순회에 나선 동포팀은 인천, 대전, 대구, 부산을 거치며 지역 강호들과 열전을 펼쳤다. 27일 부산상고와의 경기를 8-3으로 끝냈을 때 동포팀이 손에 쥔 성적표는 16전11승1무3패였다. 전해의 부진을 말끔히 씻는 훌륭한 성적이었다.

“선수들도 긴장했지만 나도 그랬네. 동포 학생야구단 감독을 맡은 첫해였으니까. 다행히 성적이 좋아 뛸 듯이 기뻤네(웃음). 장훈, 배수찬, 김성근, 현성호 같은 뛰어난 후배들이 잘 닦아 놓은 길에 누가 되지 않았다는 게 무엇보다 기뻤네.” 한재우의 말이다.

장기영이 길을 닦고 배수찬, 장훈, 김성근이 다진 모국방문대회

동포 학생야구단의 모국방문 친선경기가 처음으로 열린 건 1956년이었다. 한국일보 고 장기영 사장의 공이 컸다.

장 사장은 일본에서 태어난 동포 2세들에게 모국을 알게 하고 모국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이와 함께 그들이 배운 선진적 일본야구를 한국야구에 접목해 국내야구발전의 기폭제가 되길 원했다. ‘일석이조’ 의 효과를 노린 장 사장은 생각의 유희에서 벗어나 행동으로 옮겨 마침내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경기대회’를 창설했다.

1958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내한경기를 주선한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사진 오른쪽)이 강타자 스탠 뮤지얼(가諍?와 포즈를 취하고 獵? 고 장기영 사장은 한국야구를 위해 헌신한 인물 가운데 한명이다. 향후 한국 명예의 전당이 탄생한다면 반드시 헌액돼야할 이다.

제1회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 경기는 1956년 8월 7일부터 9월 2일까지 서울, 대전, 부산, 마산, 인천 등지에서 모두 12차전으로 거행됐다. 동포 선수들은 일본전역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선수들로 각 고등학교에서도 정규 멤버로 활약하는 이들이었다. 7월 한 달 동안 도쿄에 모여 합숙훈련으로 팀워크를 다진 까닭인지 손발이 척척 맞았다. 

예상대로 동포팀은 고교 최강이던 동산고를 2번이나 이기는 등 종합전적 12전9승3패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 당시 동포팀 이수진 감독은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 선수들이 주먹이 맞붙지 않은 상태에서 배트를 쥐더라"고 기본기 부재에 안타까움을 나타낸 뒤 “수비 역시 공을 앞에서 잡지 않고 발쪽에서만 잡으려한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한·일 고교야구의 수준 차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지적이었다.

1957년 대회에서도 동포팀은 16전13승1패2무를 기록하며 놀라운 전과를 올렸다. 이때 동포팀이 치른 16경기 가운데 11경기에 등판한 선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왼손 투수 배수찬(작고)이었다. 소속팀인 에바라고(高)에선 이름난 외야수였지만 동포팀에 선발되면서 투수로 변신한 배수찬은 외각으로 흐르는 절묘한 슬라이더로 국내 타자들을 죄다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 대회를 계기로 배수찬은 1959년 제 3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한국대표로 발탁됐고 1960년부터는 아예 귀국해 교통부, 기업은행 등에서 명외야수와 강타자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58년 역시 14전12승1무1패로 동포팀의 압승이었다. 당시 주전으로 뛰던 현성호는 다음해 배수찬과 함께 아시아선수권대회 한국대표로 출전했고 박정일은 영구 귀국해 조선맥주, 한일은행 등에서 명유격수로 활약하며 한국야구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뭐니 해도 이 대회에서 주목을 한 몸에 받은 이는 일본 나니와상고 4번 타자로 일본프로야구팀들의 스카우트 표적이던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이었다.

1960년 도에이 시절의 앳된 장훈. 동포팀 일원으로 방한했을 때 운동장 밖에서도 숱한 화제를 뿌렸다.

원래 장훈은 히로시마의 마쓰모토상고(현 세토우치고교)를 다녔다. 그러나 폭력사건에 연루돼 퇴학 처분을 받으며 오사카의 나니와상고(현 오사카체육대학부속 나니쇼고교)로 전학했다. 1학년 후반부터 주전이 돼 2학년 때는 팀의 에이스이자 4번타자로 활약했다.

하지만 고시엔 대회 출전을 눈앞에 둔 3학년 여름, 다시 폭력사건에 연루되면서 꿈에 그리던 고시엔대회 출전이 좌절됐다.

일본의 저명한 야구전문지 <슈칸베이스보루>의 야나모토 모토하루 부국장은 “장훈이 폭력 사건 당사자가 아니었지만 무슨 까닭인지 징계를 받았다”며 “당시는 국적이 죄의 유무에 개입하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악재가 호재로 작용했다. 장훈이 고시엔대회 대신 동포 학생야구단 소속으로 모국방문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장훈은 모국방문대회에서 홈런왕에 오르며 최우수선수가 됐다.

훗날 장훈은 “그때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나두 다른 이들처럼(귀화를)했을지 모른다”고 속내를 털어놨는데 그의 출전으로 동포팀은 “나니와상고의 장훈이 참가한 팀”으로 소문나며 동포 선수들 사이에서 거부감이 사라지는 계기가 됐다.

1959년 동포팀에서도 스타가 배출됐다. 투수와 내야수를 겸하던 교토 이와타고 3학년 김성근이었다. 출중한 제구력과 정교한 커브를 바탕으로 김성근은 국내 고교타자들을 압도했다. 김성근의 활약으로 이해에도 동포팀은 16전14승1무2패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김성근은 1960년 영구 귀국해 교통부, 기업은행에서 투수로 명성을 날렸다. 현역 은퇴 뒤는 충암고, 신일고 등의 감독을 거쳐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에는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스,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으로 활약했으며 2006년부터 SK 와이번스 감독을 맡아 팀을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렇듯 재일교포학생야구단은 1950년대 한국고교야구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던 시기에 모국을 찾아와 기술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쳐 한국야구가 성장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는 1960~1970년대에도 이어져 동포 야구단은 막강한 전력을 바탕으로 한국고교야구의 수준을 높이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62년 1월 타이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한국야구대표팀을 타이완야구협회장이 환영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백인천, 김정환, 김성근, 김응용, 박현식, 김영조이 나란히 서 있다. 당시 대표팀 가운데 4명이 재일동포였다. 와세대 유학파인 김영조까지 합치면 5명이 된다. 세계 2차 대전의 여파로 귀국길에 올랐지만 김영조는 일본야구계가 가장 그리워하는 선수다. 전쟁만 없었다면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타자가 됐을 것이란 게 중평이다.

박 대통령의 눈물과 봉황대기 탄생의 비밀

“1970년까지 한국고교야구가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네. 기억하기로 팀도 전국을 통틀어 25개 정도에 지나지 않았네. 동포팀은 서울을 시작으로 부산, 대전, 광주, 인천, 대구, 강릉 등 대도시를 방문해 지역 강호들과 친선경기를 벌였네. 처음엔 전승을 거뒀지만 조금씩 실력 차가 줄었네. 1970년 후반에 이르러선 승률이 5할대로 떨어졌네. 그래도 누구 하나 서운해 하지 않았어. 왜인 줄 아나?

우리가 지면 질수록 한국야구는 그만큼 발전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게 우리가 바랐던 것이니까. 그러려고 야구를 한 것이니까. 그게 우리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말없이 기뻐하고 또 기뻐할 수 있었다네.” 한재우의 진심이다.

과거 한재우가 아들과 찍은 사진. 한재우는 아들에게 자랑스런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동포 야구단을 20년 동안 맡았고 결국 성공했다. 아들이 지금도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재일의 운명이란 희생과 헌신일지 모른다. 문제는 누가 그걸 알아주느냐는 것이다. 그점에서 한국은 별로 할말이 없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1966년 서울운동장에 야간경기를 위한 조명탑이 생겼다. 일본식 조어인 ‘나이터’로 불린 조명탑 점등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김종락 대한야구협회장이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야간경기 기념대회였던 한일은행과 제일은행 경기를 끝까지 관전하던 중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선수들이 일정에 쫓겨 새벽부터 경기를 하지 않아도 됐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동포 선수들을 청와대로 불렀을 때 선수들의 고생담을 들으며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박 대통령은 그러나 이해부터 다음해인 1967년까지 동포팀을 보지 못했다. 주최 측인 한국일보가 경비 부담이 어려워 2년 동안 동포팀을 초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68년 가까스로 초청이 재개됐네. 이때부터 동포들이 부담하는 몫이 더 커졌네. 하지만 전액을 동포들이 각출했어도 군말이 없었을 거야. 모국을 가는 게 중요했지, 누가 돈을 더 많이 내느냐는 중요하지 않았거든. 그러다 1971년 한 차례 더 불참하고 마네. 경비 때문이었냐고? 아닐세. 서울운동장 8월 예약이 꽉 찼던 게야.”

1971년 9월 서울에서 제 9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당시로서는 국내에서 열리는 최대 규모의 국제야구대회라, 유일한 국제규격이었던 서울운동장은 국가대표팀의 차지였다. 서울운동장 대관에 실패한 한국일보는 동포팀에 대회 일정을 조정하자고 제안했다.

“그건 곤란했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 일본고교는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단 1시간의 수업결손도 허락하지 않았네. 그래서 동포팀이 방한한 시기도 늘 방학이었네. 방학 전 대회 시작은 곤란하다고 입장을 전달했네. 그 통에 생긴 대회가…”

봉황대기쟁탈전국고교야구대회(이하 봉황대기)다. 한국일보는 동포팀의 모국방문경기를 예상해 어렵사리 서울운동장 대관을 신청한 터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학기간이 다소 늦춰지면서 동포팀 초청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일정을 조정하자니 대표팀의 평가전과 훈련 일정이 잡혀 이마저 여의치 않고.

한국일보와 협회는 지혜를 짜내 전국에 등록된 모든 고교팀이 여름방학 중에 출전하는 초유의 대회인 봉황대기를 창설하며 난국을 돌파했다. 올해로 39회째를 맞는 봉황대기는 이같은 荑ʼn樗?끝에 탄생한 대회인 것이다. (계속)

 

 

1994년 봉황대기대회에 참가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1990년대 동포팀 가운데 가장 전력이 좋았던 팀이다. 한재우 단장(사진 뒷줄 맨 왼쪽)과 아라이 다카히로(한국명 박귀홍, 뒷줄 맨 오른쪽)가 보인다(사진=스포츠춘추) 

야구는 기록과 역사의 스포츠다. 1964년 9월 25일 대통령배 실업리그에서 김영덕(대한해운공사)이 기록한 퍼펙트게임을 4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공통화제로 삼을 수 있는 건 야구가 지닌 역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슬픈 전설이 있다. 재일동포 야구단이다.

한국전쟁으로 정체를 거듭하던 국내야구계에 새로운 야구이론과 기술을 전수하던 재일동포 야구단은 1997년을 끝으로 야구연감에서 사라졌다. 장훈, 김성근, 배수찬, 김박성, 황진환, 박귀홍 등 훗날 한·일 야구계의 거목으로 성장한 대스타들이 재일동포 야구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찾았다는 사실조차 잊힌 지 오래다.

<스포츠춘추>가 야구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수차례의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슬픈 전설’의 뒤를 밟았다.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시리즈 우승멤버로 활동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전 감독 한재우(73,일본명 니시하라 교지)씨의 인생을 되짚는 방식으로 ‘슬픈 전설’에 접근하려 한다. 기사는 총 5편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3편에 이어) 1971년을 기점으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 환영대회는 맥이 끊겼다. 경비와 일정문제가 겹치며 지역의 강호들과 혈전을 벌이던 동포팀의 전국순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이듬해부터 봉황대기대회에 초청받았다. 이전의 비중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국에서 자신들을 잃지 않고 초청한다는 게 한재우로선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선수들을 위해 포기할 수 없는 모국방문이었다.

“일본 전역을 돌며 선수들을 모으고 경비를 조달하려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를 할 때면 속으로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다’하고 결심했네. (고개를 끄덕이며)그래, 그렇게 하지 못했지. 왜냐고? 모국방문이 고작 1달이었지만 그 짧은 기간에 아이들은 조국에 눈을 떴고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느꼈네. 놀라운 건.”

방한 전 20%만이 자발적인 선수단 참여고 80%가 부모나 친지의 강권이었다면 방한 뒤는 90%가 다시 한국을 찾고 싶다고 자발적으로 손을 들었다.

“그러니까 20년 넘게 아이들을 데리고 방한했던 게야. 데려왔는데 싫다고 하면 어쨌겠나. 내가 장사꾼도 아니고. 좋다고 하니까 계속 왔지.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일본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한국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한재우는 지금도 당시 부모들이 보내온 편지를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감독님. 고맙습니다. 어제 아들놈이 저를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한국말로 말입니다. 농담인가 싶었는데 이 녀석이 다시 한국말로 ‘아버지 사랑해요’ ‘고맙습니다’라고 하지 뭡니까. ‘한국’ 이야기만 나오면 ‘더럽다’던 녀석이 한국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감독님. 기적이 일어났어요. 오늘 막내방에 청소하러 들어갔더니 벽에 태극기가 붙어 있지 뭐에요. 커서 자위대 제독이 되겠다던 아이였는데요. 감독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어찌나 안 가겠다고 버티는지 공항에서 울고불고 하던 녀석이 허허, 집에 오자마자 한국에 또 가자는 겁니다. 어디서 샀는지 지 에미한테 비녀를 주더군요. 피가 정말 물보다 진하긴 진한 모양입니다.”

신년이면 한재우의 집은 인사 차 들른 동포팀 출신 제자들로 북적였다.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연락을 주고받는 등 식구처럼 지냈고 경조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1986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방한한 가네모토 도모히로(한국명 김박성, 사진 가운데)와 동료 선수들이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방한 전까지 시큰둥하던 선수들도 일단 한국을 경험하고 돌아가면 자신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아니 혼자가 아님에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사진=스포츠춘추)

“이제야 고백할 게 있네. 1962년 대구 전국체전(전국체육대회)에 참석하기 전까지 난 한국말이 무척 서툴렀네. 아주 간단한 말은 알아들었지만 쓰거나 읽은 줄 몰랐네. 말하기도 다르지 않았어. 부끄럽지만 한 번은 선수들 식사를 시켜야 하는데 식당의 메뉴판을 읽지 못해 한참을 서 있었다네. 그때의 무력감은…(잠시 침묵한 뒤) 그때부터 한국어를 공부했네. 초등학생용 국어교과서를 빌려 매일같이 읽고 썼어.”

누군가에게 조국은 공기와 같다. 별도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공기는 그의 폐로 들어가 심장의 혈관을 따라 전신으로 생명을 전달한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에게 조국은 살점을 떼는 고통이 따른 뒤에야 찾아오는 안식이다. 그것도 불편한 안식. 다음의 이야기는 조국이 공기같던 일들이 살점을 떼면서 조국을 찾던 이들에게 행한 부끄러운 역사다.

일본에선 “조센진”,  한국에선 “반쪽발이”

1974년 4회 봉황대기대회에 참가한 한재우와 선수들은 헬륨이 가득한 풍선처럼 들떠 있었다. 일본의 고시엔 대회에 출전한 것만큼이나 우승 의지가 강렬했다. 그러나 고시엔만큼이나 힘든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국 45개팀과 동포팀 등 46개팀이 출전한 봉황대기대회는 토너먼트로 진행됐기에 한 번의 실수는 곧 ‘집으로’를 의미했다.

“봉황대기 우승 깃발을 들고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었네. 우릴 도와준 이들이 많았으니까. 선수들과 경기마다 다짐했네. ‘저 깃발은 우리의 것’이라고.”

그리 되는 듯했다. 매경기 큰 실력차를 보이며 이윽고 결승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하필 결승 상대가 강호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였다. 전해 8강에서 1-0로 동포팀을 제압한 바 있는 대구상고는 김한근, 김운용 두 주력투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기다 타선 역시 훗날 한국야구 최고의 교타자로 불릴 장효조가 버틴 터였다.

“(장효조는)멀리서 봐도 뛰어난 타자였네. 하지만….” 더 무서운 타자가 있었다. 일부 관중과 야구인들이었다.

1회초 동포 타자들이 타석에 들어섰다. 그때였다. 상대 관중석에서 이상한 응원구호가 들렸다. “반쪽발이! 화이팅”이라는 비아냥이었다.

“지금도 잊지 않아.” 한재우의 얼굴이 화석처럼 굳어졌다. 안타라도 치면 “반쪽발이”는 “쪽발이”로 돌변했다. “일본에서 ‘조센진’이란 소릴 듣고 자란 아이들이었네. 그래도 모국이라 찾아온 아이들에게 그들은 ‘쪽바리’라 했네.” 득점기회가 오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어른들이야 참는다지만 아이들은 어땠겠나. 아이들은….” 순간 한재우의 입술이 말라서 모래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가벼운 투정에 불과했다. 동포 선수들을 향해 침을 뱉거나 쌍욕을 퍼붓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재일동포와 일본인을 구분하지 못하고 선수들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이들도 있었다.

특히나 한국말에 능통하지 못한 동포 선수들을 대놓고 비난하는 이들이 많았다. “화교는 중국말을 잘하는데 ‘재일(在日)은 뭐냐”며 “이들을 초청하는 건 세금낭비”라고 주장한 언론도 있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40년이 넘게 부자연스러운 한국말로 비난받는 이가 있다. 김성근(67) SK 감독이다. 1959년 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방한한 뒤 이듬해부터 한국 실업팀에서 뛰기 시작한 김 감독은 올해로 한국 생활 50년째을 맞는다. 그러나 김 감독의 한국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이들은 “반세기 동안 한국에 살면서 도대체 한국어 실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되냐”며 비난을 퍼붓는다.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가운데 한 이는 사석에서 “일본이 자랑스러운 모양이지”하며 비꼬기도 했다. 어째서 김 감독은 반세기가 흐르도록 한국말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것일까.

“김 감독의 일본어는 더 심하네. 한국말보다 더 알아듣기 힘들다고. 목소리가 작은데다 입안에서 ‘우물우물’ 한단 말이지. 누가 그러더군. ‘김 감독의 혀가 짧아서 그렇다’고.” 한재우는 되레 이 같은 비난에 힘줘 대응하지 않은 김 감독을 책망했다.

“김 감독 일절 말 안했다고. ‘변명하라’해도 입 다물었다고. 그런 사람이야. 내가 선배인데도 간만에 한국 와서 ‘성근이 보자’하면 ‘선배님 죄송합니다. 이 일을 다 끝내야 뵐 수 있겠습니다’한다고. 그럼 난 밤 11시까지 기다려서 잠깐 본다고.”

김성근 SK 감독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그의 한국어 실력에 집중해 비난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김 감독이 한국어 발음만 이상한 게 아니라 발화구조상 어느 언어를 사용해도 어눌한 말투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아는 이는 거의 없다. 김 감독이 일체 이와 관련돼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 김 감독에게 발음이란 결코 진심보다 선행하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사진=SK)

한재우가 먼 산을 바라보다 허한 숨을 내쉬었다. “김 감독은 여기 일본에서도 대우를 해주는 야구인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지금도 ‘반쪽발이’냔 말이지. 말이 없어 냉정해 보이지만 참 인정이 많은 이야. (혼잣말로)다시 태어나면 부모님께 그래야겠어. ‘아버지, 어머니 꼭 제가 태어나고 싶은 곳에 낳아 달라’고 말이야.”

초대받았으나, 환대받지 못한 이방인

결국 동포팀은 대구상고에 5-10으로 지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일부 관중의 극렬한 야유가 원인이었지만 이는 차라리 애교에 가까웠다. 1990년대 초 한재우는 대구상고 출신의 유명 선수로부터 어째서 동포팀이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섰는데도 번번이 대구상고에 졌는지 듣게 됐다.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 그때 동포팀은 절대 대구상고를 이길 수 없었다고. 무슨 말인가 했네. 허허, 심판이 경기 중에 그랬다는 거야. ‘왜 외부인한테 우승기를 뺏겨야 하느냐’고. ‘스트라이크 존 잘 잡아줄 테니까 맘 놓고 치라’고 말이지.”

당시 아마추어 야구계는 심판 로비가 극성을 부렸다. 서울운동장 주변에서 감독을 불러내 ‘술을 사라’며 은근히 무언가를 요구하는 심판도 없지 않았다. 이에 불응하면 보기 좋게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한재우는 이 같은 부조리를 보며 우승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동포팀은 1972년부터 1997년까지 봉황대기에 참가하는 동안 우승 없이 1974, 1982, 1984년 공히 준우승을 차지했다. 여기서 ‘준우승에 그.쳤.다’가 아니라 ‘준우승을 차.지.했.다’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승부를 떠나 동포 선수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조국을 이해하는데 성공했고 동포팀을 따뜻하게 반기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한 할 때마다 가장 먼저 숙소로 찾아와 불편한 점이 없나 살피고 선수들을 호텔로 데려가 따뜻한 음식을 먹이던 한국일보 고 백상(百想)장기영 사장을 한재우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동포팀이 경비가 없어 쩔쩔 맬 때보다 묵묵히 경비전액을 지원하던 양원석(일본명 야나가와 지로)도 눈에 밟히는 이다. 재일동포들을 폭력배들로부터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전후 야나가와구미(柳川組)를 조직한 양원석은 뒷날 야마구치구미(山口組)에 흡수되며 일본 야쿠자 사상 가장 무서운 행동대장이 됐다. 그러나 신문의 독자 투고란에 어느 교포소녀가 ‘재일동포의 이름을 더럽히는 폭력조직을 해체하라’고 쓴 것을 읽고 충격을 받아 조직을 해산한 뒤 프로복싱 조직 IBF의 국제 커미셔너로 활동했다.

“그 양반들은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야구를 지원하고 있을 지 몰라. 그럴 양반들이라고. 나중에 내 따라 올라가면 그땐 내가 술 한잔 대접해야겠어. 여긴 추운데 그쪽은 어떨지 모르겠네…” 한재우의 눈가에 새벽이 찾아왔다.

한재우가 이끈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은 봉황대기대회에서 3번의 준우승을 차지했다. 초대받았으나, 환대받지 못한 그들에게 우승이란 결코 손을 맞잡을 수 없는 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포 선수들은 자신의 야구인생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을 이 대회에서 몸을 날렸다. 일부 선수들은 고시엔 대회 본선에서 자신의 소속고가 탈락이라도 하면 바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날아왔다(사진=스포츠춘추)

고교야구의 몰락, 동포팀의 사라짐

한재우는 1987년을 끝으로 동포 학생야구단 감독에서 물러났다. 이듬해부터 재일본대한야구협회 회장을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봉황대기대회 때는 동포팀과 함께 방한했고 선수수급에서도 많은 도움을 줬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네. 일본이 프로야구와 관계없이 고시엔대회의 인기가 여전한 것처럼 한국도 그러리라 예상했네. 하지만 반대였어. 3만 관중이 꽉 차던 동대문야구장에 결승전 손님도 많아야 3천 명 가량이 입장했네.”

고교야구의 몰락은 동포팀에겐 사형선고였다. 1990년대 이르러 동포팀은 화제의 대상도, 더 이상 강팀도 아니었다. 어둠 속의 한국야구를 위해 푸른 불빛을 반짝이며 비전을 제시하던 ‘비상구’ 동포팀은 조금씩 점멸하고 있었다. ‘딱’ 한 번 마지막 불꽃을 반짝인 적이 있었다.

“1994년 봉황대기 동포팀 멤버가 무척 좋았네. 나중 일본프로구단에 2명이나 입단했으니까. 그게 누구였냐고? 보자, (당시 자료를 들추며)긴키대부속고의 김용언과 히로시마공고의 박귀홍이었구먼. 일본명으로 긴조 다쓰히코(요코하마)와 아라이 다카히로(한신)였네."

2000년 센트럴리그 타율왕에 오르며 신인왕을 거머쥔 긴조는 정확한 타격과 넓은 수비범위로 일본프로야구 외야수 가운데 톱클래스로 뽑히는 선수다. 2006년 제 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일본 대표팀으로 출전해 국내야구팬들에겐 낯이 익다.

아라이는 2005년 센트럴리그 홈런왕으로 히로시마 토요카프 시절부터 거포였던 선수다. 2008년 FA(자유계약)선수로 풀리며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있는 한신으로 소속을 옮겼다.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예선 한국전에서 선제 2점 홈런 포함, 3안타 2타점으로 맹활약하고도 밝게 웃지 않아 일본야구팬들로부터 의문을 산 바 있다.

아라이는 2008년 히로시마 토요카프에서 한신 타이거즈로 팀을 옮긴다. 가네모토 도모히로, 히야마 신지로와 2명의 다른 동포 선, 후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한신 관계자의 증언이다.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예선 한국전에서 2점 홈런을 치고 난 뒤 일본기자들의 질문에 단답식으로만 대답해 일본야구팬들로부터 항의 아닌 항의를 받은 바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당시 긴조는 투수와 야수를 겸했네. 아라이는 그 나이 때 가네모토보다 힘이 좋았지. 예상대로 8강까진 쉽게 갔네.”

한재우의 기억대로 16강전에서 동포팀은 휘문고를 상대로 홍성훈의 4타수 2안타 3타점 등 타선이 고르게 터지며 8대1로 승리했다. 그러나 8강에서 만난 덕수상고는 공교롭게도 그해 최강팀이었다. 동포팀은 아라이를 중심으로 안타수 13대 10에서 보듯 막강한 타격을 선보였지만 덕수상고 이종민, 김상태의 맹활약으로 7-9로 졌다.

이 대회에 참가했던 한 재일동포는 오사카에서 만난 <스포츠춘추>에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대회”라고 털어놨다. 4강행이 좌절된 까닭일까. 아니다. 숙소 주변에서 한국 학생들이 “쪽발이”라고 놀리며 시비를 걸어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더듬거리는 말로 ‘우린 재일동포’라고 말했지만 출동한 경찰은 오히려 그 학생들 편이었다”며 그 때문에 분한 마음이 든 동포 선수들이 “다시는 한국에 오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했다.

73살의 야구소년의 꿈

3년 뒤 1997년. 이해 봉황대기를 마지막으로 동포팀은 더 이상 모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주최 측에선 참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동포들도 봉황대기를 조국을 이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계기로 삼지 않았다. 글로벌 사회에 ‘민족’과 ‘피’는 색깔을 잃은 지 오래였다. 동포 3세를 넘어 4세로 갈수록 미귀화자가 적어 선수단 구성에 애로가 있던 현실적 배경도 한몫했다.

“1969년 동포 학생야구단을 맡아 1997년 마지막으로 선수들을 데려올 때까지 쭉 계산을 해봤네. 총 600명의 선수들이 모국땅을 밟았더군. 이 가운데 총련계 선수가 70명이었네. 그게 보람이라면 보람이었을 거네. 왜 안 그런가. 모국땅은 삼팔선이 쳐져 있어 왕래를 못하지만 야구엔 철조망이 없다는 걸 보여준 셈이잖나.”

젊은 시절의 한재우. 이제 그는 73살의 노인이다. 그러나 아직 꿈을 꾸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 나이란 오래된 라이벌에 불과하다. 한국야구계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들을 아무 대가없이 도왔던 이들을 잊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동포팀의 방한이 전무해진 뒤로도 한재우는 한·일 고교야구의 교류와 아시아고교야구 발전을 위해 음지에서 노력했다. 한국 아마추어팀이 오사카로 훈련이라도 온다 치면 무료로 구장을 알선했고 프로선수들이 부상치료 차 일본을 방문하면 자신의 방을 내줬다. 김광현, 정대현, 이진영이 한재우의 집에서 신세를 졌던 선수들이다.

한재우는 지난해 6월 재일본야구협회 회장에서 물러났다. 공식적인 활동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도 꿈을 꾼다는 점에서 그는 영원한 현역이다.

“재일본야구협회 임원들 자식들 가운데 야구선수가 좀 있다고. 봉황대기까지는 아니라도 서울이나 부산에서 친선경기를 하면 어떨까 싶네.”

마지막으로 그는 소프트뱅크 타격코치로 활동 중인 아라이 히로마사와 한 선수를 가리키며 “꼭 동포팀에 선발하고 싶던 선수였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제와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한재우는 73살의 꿈꾸는 야구소년이다.

게다가 그는 야구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구름 뒤 숨어있지만 조수를 주관하는 달처럼 야구의 강한 인력은 언제고 그를 다시 그라운드로 인도할 것이다. “다시 감독을 맡게 된다면 저 친구를 꼭 데려가고 싶네.”

그가 가리키는 TV엔 요미우리 자이언츠 3번 타자 오가사와라 미치히로가 힘차게 스윙을 하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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