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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비극
대한민국의 비극
‘실적’으로 말하는 대신, 자신들의 실패와 무능을 ‘선전선동’으로 가려보려는 자들이 ‘대한민국’이라는 배의 키를 잡고 있다는 것 -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1.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 한복 차림의 예쁜 처녀가 나타난다. 그녀는 부채를 쥔 손을 앞으로 뻗으면서 판소리 한 마당을 벌인다.
“저기 어깨 처진 양반들 이 내 말 좀 들어보소!
끈질긴 성품 좋거니와 ~ (얼쑤)
부지런한 성미 (그렇지)
뱃심 한번 두~둑하고
어려울수록 똘똘똘똘똘 자~알 뭉치는
대한민국~ (얼씨구나~ 좋다~)“
어느 사이엔가 그녀를 둘러싼 시민들의 얼굴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한다. 판소리를 하던 처녀는 부채를 펴고 농악대, 탈춤패,시민들과와 어우러져 신명나게 춤을 춘다.
“우리 국민이 신명나면 우리 경제도 얼쑤~”라는 외침과 함께 멘트가 나온다.
“공익광고협의회”라고.>
아침 출근시간에 시청 지하철역을 나올 때면 프레스센터 전광판에서 방영되는 <경제자신감 회복-판소리편>이라는 공익광고다. 이 광고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나 TV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나온다.
그 광고를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난다. “이 놈의 정부가 ‘실적’을 가지고 국민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까, 되지도 않는 선전공세로 국민들을 세뇌시키려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저기 어깨 처진 양반들 이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요즘 어깨가 처진 사람들이 많다.
중소기업인들이나 동네 상점 주인들은 장사가 안 되서, 재벌들은 검찰,공정거래위원회,국세청,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감독원, 시민단체들의 파상공세가 무서워서 어깨가 처져 있다.
젊은이들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직장인들은 언제 회사에서 밀려날지 몰라서 어깨가 처져 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은 정부가 새로운 부동산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내 집을 마련할 희망이 점점 멀어져서, 집이 있는 사람들은 턱없이 오르는 세금에 짓눌려서 어깨가 처져 있다.
국민들이 왜 어깨가 처져 있고, 왜 신명이 나지 않나? 한 마디로 경제가 안 좋기 때문이다. 왜 경제가 안 좋은가?
국내 기업들은 못 살게 굴고, 외자는 쫓아내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을 죄인이나 ‘봉’으로 치급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뼈빠지게 일해 봤자 세금과 국민연금, 건강보험, 기타 준조세로 소득의 3분의 1을 빼앗아 가는 바람에 일할 의욕이 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작년보다 월급은 약간 올랐지만 실제 소득은 줄어들었다. 세금과 국민연금, 건강보험 등이 월급 인상분 이상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쁜 처녀 앞세워서 판소리 한 마당을 벌인다고 없는 ‘신명’이 살아나나? 그리고 “우리 국민이 신명나면 우리 경제도 얼쑤~‘라고?
이 얼마나 비과학적이고, 앞뒤가 거꾸로 된 얘기인가? 경제가 잘 돼야 신명이 나지, 신명이 나야 경제가 잘 되나?
노동생산성과 기업경쟁력 저하, 기업의 투자 부진, 사회간접자본투자 부족, 실업, 과중한 조세 부담, 고령화, R&D기반 미흡 등 우리 경제의 산적한 문제들이 국민들의 ‘신명’ 하나로 풀릴 수 있는 것들인가?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신명’이니,‘신바람’이니 하는 것으로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
물론 과거 우리 국민들 모두가 ‘신명’나게, ‘신바람’나게 일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비전과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면서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고 국민들을 독려하는 지도자가 있었다. 그 과업은 국민들의 비원(悲願)이기도 했기에 지도자와 국민은 혼연일체가 되어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그에 따라 개인의 살림도, 나라 경제도 나아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러다보니 국민들에게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도 생기고, ‘신명’도 나고,‘신바람’도 났던 것이다.
이 정권은 얼마나 국민들이 마음에서부터 공감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했고, 그 비전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했나? ‘비전’도‘ 목표’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신명’만 강조한다고 경제가 나아지나?
“어려울수록 똘똘똘똘똘 자~알 뭉치는 대한민국~”이라고?
누구를 중심으로, 무엇을 위해, 뭉치란 말인가?
게다가 대한민국 현대사를 난도질하고, 태극기보다 한반도기를 더 중히 여기고, 대한민국헌법을 밥 먹듯 위반하는 자들이 공익광고에서는 왜 그렇게 ‘대한민국’이라는 자주 들먹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2.
내가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는 허접스러운 공익광고에 이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에 APEC정상회담 장면과 백범 선생 등을 동원해 가며 행정복합도시의 정당성을 선전하던 국정홍보처 광고도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선전들이 우리 사회가 불건전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징조라는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들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한 때 북한체제에 막연한 호의를 가지고 북한경제를 연구했던 어떤 학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에서는 알곡 생산량 얼마, 철강생산량 얼마 하는 식으로 경제실적을 구체적인 수치로 발표했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알곡생산목표를 ○○ 퍼센트 초과달성했다’는 식의 얘기만 나오지, 구체적인 실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북한 사회의 실체를 들여다 본 그는 북한에 대한 환상을 버렸다.
그가 지적한 ‘1960년대 후반’은 북한에 김일성 유일사상체계가 구축되기 시작하는 시기다. ‘능률’과 ‘실질’ 대신 ‘이념’, 아니 ‘수령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충성’이 중시되는 사회가 되면서 북한 경제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경제성과를 자신 있게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북한은 한편에서는 인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데도, “세상에 부럼 없어라”,“우리는 행복해요”라는 황당무계한 구호가 판을 치는 엽기적인 사회가 되고 말았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정부의 ‘공익광고’들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북한 사진이 하나 있다.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단 군복 차림의 노친네들이 논둑에 일렬로 늘어서서 모내기하는 농민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진이다. 늙은 명예군인(제대군인)들이 모내기 전투하는 농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나?
북한의 농업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은 간단하다. 한계에 도달한 협동농장 체제를 해체하고, 해방 후 북한에서 ‘토지개혁’을 할 때의 구호처럼 ‘밭은 밭가리 하는 농민에게’ 돌려주면 되는 것이다. 중국이 인민공사를 해체, 농민들에게 농지를 장기 임대하고 생산물을 처분할 권리를 인정하게 되면서 중국의 농업생산성은 일거에 네 배로 뛰었고, 과거 식량수출국이었다가 집단농장제 도입 후 식량수입국으로 전락했던 베트남은 다시 식량수출국이 되었다. 중국과 베트남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근본적인 치유를 할 생각은 않고 ‘늙은 군인의 노래’를 듣는다고 북한 농민들이 신명이 나고, 생산성이 좋아지고, 식량문제가 해결되나?‘하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젓곤 했다.
경제가 망가져 어깨가 처진 사람들에게 ‘어깨 펴고 신명내라“고 강요하는 <경제자신감 회복-판소리편> 따위의 공익광고는 북한경제가 망가진 근본원인을 치유할 생각은 않고 농민들을 격려한답시고 늙은 제대군인들을 동원해서 혁명정신을 고취시키는 노래나 부르게 하는 북한의 작태와 꼭 닮았다.
그런 식의 선전과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는 것이 ‘양극화 문제’ 제기에서 보는 저열한 ‘선동’공세이다.
‘실적’으로 말하는 대신, 자신들의 실패와 무능을 ‘선전선동’으로 가려보려는 자들이 ‘대한민국’이라는 배의 키를 잡고 있다는 것 -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