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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박동희의 야구탐사] ‘슬픈 전설’, 재일동포 야구단

  작성자: 전경179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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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03-25 13:43:57

 

1955년부터 1997년까지 해마다 여름이면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한국을 방문해 친선경기를 가졌다. 재일동포 야구인들에겐 조국을 발견하는 기회였고 한국야구로선 선진야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야구는 기록과 역사의 스포츠다. 1964년 9월 25일 대통령배 실업리그에서 김영덕(대한해운공사)이 기록한 퍼펙트게임을 4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공통화제로 삼을 수 있는 건 야구가 지닌 역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슬픈 전설이 있다. 재일동포 야구단이다.

한국전쟁으로 정체를 거듭하던 국내야구계에 새로운 야구이론과 기술을 전수하던 재일동포 야구단은 1997년을 끝으로 야구연감에서 사라졌다. 장훈, 김성근, 배수찬, 김박성, 황진환, 박귀홍 등 훗날 한·일 야구계의 거목으로 성장한 대스타들이 재일동포 야구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찾았다는 사실조차 잊힌 지 오래다.

<스포츠춘추>가 야구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수차례의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슬픈 전설’의 뒤를 밟았다.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시리즈 우승멤버로 활동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전 감독 한재우(73,일본명 니시하라 교지)씨의 인생을 되짚는 방식으로 ‘슬픈 전설’에 접근하려 한다. 기사는 총 5편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1969년 일본 오사카 재일대한야구협회 사무실 앞. 5월인데도 대기는 세계의 냉장고를 모두 개방한 듯 차가웠다. 바람도 예사롭지 않아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몸이 오그라들었다.
“날씨도 이런데 그만 둡시다.”
가뜩이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한재우였다.

“어허, 한 선생. 그쪽에 이미 간다고 알렸는데 여기서 없던 일로 하면 큰일 나요. 큰일. 그러지 마시고 눈 ‘딱’ 감고 다녀옵시다. 한 선생이 아니면 이 일을 성사시킬 사람이 없어요.”
재일대한야구협회 관계자가 돌아서려는 한재우의 팔을 잡았다. 어찌나 팔 힘이 센지 한재우가 ‘앗’ 하고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손 쳐도 그렇지. 어찌 명예가 목숨인 야구인이 야쿠자를 찾는단 말입니까. 사정이 급해도 이?아닌 듯합니다.” 한재우가 관계자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등을 돌린 순간. 뒤에서 나지막한 절규가 들렸다.

“한 선생. 그럼 아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모국방문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은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모국분들은 또 어떻고요.”

태엽이 다 풀린 장난감처럼 한재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리 없는 일이었다.

은퇴한 야구선수, 다시 그라운드에 서다

1936년 일본 오사카 태생의 한재우는 재일동포 2세다. 일본명은 니시하라 교지. 본적은 경상남도 고성이다. 참혹하리만큼 못 먹고 못 살던 시절 한국인 아버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갖은 핍박과 차별을 견딘 끝에 야구선수가 됐다.

오사카부립 기시와다 고교 재학 시는 왼손 투수로 간사이(관서)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다. 1956년 고교 졸업과 발맞춰 여러 팀의 구애를 뿌리치고 명장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있던 니시데쓰 라이온즈(현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기시와다 고교 졸업생 가운데 최초의 프로야구 입단자답게 당시 그의 몸값은 100만 엔에 가까웠다. 초고교급 대우였다.

입단 시는 훗날 ‘하느님, 부처님, 이나오님’으로 유명해질 동기생 이나오 가즈히사보다 더 큰 기대를 모았다. 1957년 일본시리즈에선 중간계투로 출전해 팀 우승에 한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선배에게 구타를 당한 뒤 갈비뼈를 다치고 왼쪽 어깨부상이 겹치며 기대만큼의 성적은 올리지 못했다. 개인 통산 3승 7패 평균자책 3.35가 6년 동안 프로에서 뛰며 그가 남긴 기록이었다.

1956년 니시데쓰 라이온즈 입단 당시의 한재우(사진 뒷줄 맨 왼쪽). 그를 어깨동무하고 가운데서 환히 웃는 이가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투수 5인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는 이나오 가즈히사다. 입단 동기생인 둘의 우정은 평생 이어진다(사진=스포츠춘추)

1961년 은퇴 뒤는 오사카에서 미즈노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하며 청년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가 손에서 놓은 줄만 알았던 야구는 정작 그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도 마찬가지였다.

“1962년 여름, 가게로 이즈미사노시(市) 한국 거류민단(민단) 관계자 몇 명이 찾아왔네. 무슨 일로 왔나 했지. 뜬금없이 10월 한국 대구에서 전국체전(전국체육대회)이 개막한다고 하는 게야. 재일동포들도 참가를 하기로 했다는데 야구는 가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일본지역 예선전을 치른다지 뭔가. 나보고 이즈미사노시(市) 동포 야구선발팀에서 뛰어달라고 하더라고.”

한재우는 정중히 거절했다. 왼쪽 어깨를 다쳐 공을 잡을 수 없을 뿐더러 한창 바쁠 때 가게를 비우고 한국에 갈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민단 관계자들은 “투수 이외의 포지션에서 뛰어 달라”며 통사정을 했다. 요지부동이던 한재우의 마음을 되돌린 건 “이번 기회에 모국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어머니의 설득이었다.

결국 한재우는 이즈미사노시(市) 동포 선발팀에 합류했고 전국체육대회 일본지역 예선전에 참가한다. “아마 나고야 동포 청년회팀이랑 결승전을 벌였을 거야. 거기서 우리가 사요나라(끝내기) 안타로 이겼네. 이즈미사노시(市) 동포 선발팀이 재일동포 대표로 전국체전이 열리는 대구땅을 밟게 된 게지."

한재우의 기억에 의하면 재일동포 대표팀의 유니폼과 용품은 이즈미사노시(市)에 위치한 사카도모 방직 주식회사의 서갑호 씨가 사재를 털어 지원했다.

첫 모국방문으로 설렐 법도 했지만 재일동포팀은 각계의 지원과 정성을 생각해 경기에만 집중했고 결국 우승컵을 안는데 성공했다.

“지금도 전국체전 폐막식 때 들었던 노래가 귀에 선해. 무슨 노래냐고?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래 시작하는 노래가 있잖은가. 그때는 내가 한국말을 거의 몰랐다고. 그냥 멜로디만 들었지. 그런데 이상하게 귀에서 노래가 안 떠났네. 어느 노인네가 나를 ‘꽉’ 안아주는데 희한하게 눈물이 나지 뭔가. 그때 처음으로 ‘아, 이게 민족애인가 보다’ 생각했지.”

이때를 경계로 한재우는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전국체전을 마친 뒤 찾은 아버지의 고향 경남 고성에선 모호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깨닫게 됐다.

“그전까지 말만 한국인이었지 가슴 깊은 데선 그런 느낌이 없었다고. 대구 전국체전을 다녀와서 ‘확’변했지. 다음해 전주 전국체전 때는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선수 겸 감독으로 출전했네."

1962, 1963년 전국체전에 출전한 재일동포팀은 대회 2년 연속 우승에 성공하며 수준 높은 야구를 국내에 전수했다.

“1963년 동포 야구팀 멤버 가운데 서정리(작고)라고 있었네. 내가 데려간 친구지. 이 친구가 전국체육대회가 끝난 다음 그해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대회 한국 국가대표로 뽑혔어. 자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한국이 처음으로 아시아선수권대회 챔피언에 오른 게 바로 그 대회였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시 국가대표 선수들 가운데 4명이 재일동포였다는 거야. 신용균, 배수찬, 박정일, 서정리가 다 재일동포였다고.”

한재우는 지금도 재일동포 야구선수들이 모국의 야구발전에 기여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고 그걸 일생의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절친한 후배 김성근 감독의 SK가 한국시리즈에서 2년 연속 우승했을 때도 ‘후배가 우승했다’는 것보다 ‘후배가 한국야구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에 자기 일처럼 기뻐했던 그였다.

1963년을 끝으로 한재우는 야구와 다시 담을 쌓는다. 결혼과 아내의 출산으로 두 아들이 생기며 경제활동에 충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구는 한 번 결박한 그를 좀체 놓으려 하지 않았다.

현역 은퇴 뒤 미즈노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하던 한재우와 그의 아내. 뛰어난 경영수완으로 오사카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스포츠용품점으로 성장시켰다. 재일동포 야구단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오사카의 거부(巨富)가 됐을 것이란 게 동포 사회의 평이다(사진=스포츠춘추)

1967년 봄. 평소 안면이 있던 재일한국야구협회 최태환(작고)이사가 한재우를 찾았다. 최 이사는 한재우를 보자마자 대뜸 “감독을 맡아 달라”고 읍소했다.

“1955년부터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재일동포 고교야구단이 모국을 방문해 친선경기를 벌였다 하더라고. 그런데 나더러 그 팀의 감독을 맡아달라는 거야. 스포츠용품점도 운영해야 하고 가정도 있는데 1달간 집을 비우는 건 곤란하다고 했지.”

하지만 이번에도 한재우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한국을 거의 모르는 재일동포 2, 3세들에게 방한 친선경기는 모국을 이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는 주변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감독을 맡은 한재우는 그러나 감독직을 맡자마자 갖가지 난제와 씨름해야 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경비조달이었다. 한 번 모국방문을 할 때마다 수백만 엔씩 소요되는 경비를 마련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재우는 재일대한야구협회 관계자와 백방으로 후원을 받기 위해 뛰어다녔고 마침내 유력한 후원자를 소개받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후원자가 유명한 야쿠자라는 데 있었다.

남(男)대(對)남(男)

재일대한야구협회 관계자의 손에 이끌려 한재우는 오사카의 대저택에 들어섰다. 두 사람은 정문부터 몇 단계의 엄격한 검문을 거친 뒤에야 안방까지 갈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반갑습니다.” 안방문을 열자 중년의 사내가 두 사람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상대의 손을 맞잡은 한재우는 그의 악력에서 보통사람이 아님을 느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재우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 선생.”
순간 한재우가 상대를 쳐다봤다. ‘날 안다고?’

“한 굳萱?니시데쓰 라이온즈의 瞿뻥첩??3년 연속 당시 주요 우승멤버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오사카 동포 사회에서 한 선생을 모르는 동포가 누가 있단 말입니까.”
상대는 분명 ‘동포’라고 했다. 오사카에서 아니 일본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한 야쿠자가 ‘동포’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지난해 재일대한야구협회장에 용퇴한 한재우는 지금도 한국야구 발전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당시 일본에 살던 한국인은 할 게 없었다고. 많이 배우길 했나, 돈이 많나. 거기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옛날에는 엄청나게 차별이 심했네.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한국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취직이 어려웠으니까.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지 않겠나. 연예인, 운동선수는 잘 풀린 경우고 많은 이들이 야쿠자에 가입했던 게 사실이네. 그이도 재일동포 야쿠자였지.” 한재우의 회고다.

당시 한재우가 만난 야쿠자는 오사카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야마구치구미(組)의 핵심인사였다. 지금도 일본 암흑가에선 복부에 총을 맞고도 야쿠자간의 전쟁을 지휘했던 그의 전설이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동포 사회에선 의적과 같은 인물로 통했다. 특히나 야구를 좋아해 재일동포 야구선수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사정은 들었습니다. 재일동포 모국방문 학생야구단이 예산이 없어 고생하신다고요.” 그가 차를 권하며 운을 뗐다.
“예산이 없어도 우린” 한재우가 대답하려할 때 협회 관계자가 말을 낚아챘다.
“그렇습니다. 아이들 비행기 값도 모자라 자칫 모국행이 좌절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뒤 “그럼 한 번 방문 때마다 얼마나 경비가 듭니까”하고 물었다.
“350만 엔 정도가 듭니다.”
“350만 엔이라, 350만 엔이라. 음.” 짧게 신음소리를 내는 그를 보며 한재우는 괜히 왔다는 생각을 했다. 제 아무리 대단한 야쿠자라도 350만 엔이면 큰돈이었다.

“보통 모국방문을 할 때 20명 정도가 가서 한달 정도 있다 온다고. 왕복 항공비, 숙박비 그 밖의 경비를 모두 합치면 그 정도는 들게 마련이었네. 한국에서 지원을 한데도 대개는 동포들이 경비를 조달했네.” 한재우는 당시를 회상하며 동포 야쿠자가 했던 말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무슨 말이었을까.

“아이들이 모국을 찾겠다는데 돈이 길을 막아서야 되겠소. 내 도와드릴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시오.”

한재우는 지금도 그와의 만남이 어제 일 같다. “동포 사회엔 못된 일 안했어도 일본인들은 그이를 무서워했다고. 야쿠자니까. 그런데 앞에선 총싸움을 하고 별짓을 다해도 뒤에선 그 냉혹한 양반이‘모국’말만 나오면 눈시울을 붉혔다고. 그이 같은 이들이 없었다면 재일동포 야구단의 모국행은 진작 중단됐을 거야.”

한재우의 회고대로 그의 지원은 1회에 그치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계속 됐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던 배경에는 이토록 피와 맞바꾼 돈을 쾌척한 동포 야쿠자들의 숨은 노력이 스며있었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감독시절 한재우는 선수 구성을 위해 일본 내 3천개에 달하는 고교야구부를 하나하나 조사해 동포 선수가 뛰는지 체크했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이가 있었으니 '오사카의 호랑이' 김박성이었다. 사진은 한재우가 깨알같이 작성한 동포 선수카드다(사진=스포츠춘추)

“이제 한숨 돌리나 했지” 당시를 회상하는 한재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이게 웬걸. 돌아보니까 출전할 선수들이 없지 뭔가. 민단계나 총련계 학교에서 차출하면 안 됐냐고? 허허. 당시 야구부는 주로 일본 학교에만 있었다네. 게다가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실력 없다는 소문이라도 나보게. 모국분들이 얼마나 실망하겠네. 그래, 믿기지 않겠지만 야구부가 있다는 일본 내 3천개가 넘는 고등학교를 모두 찾았다고. 지금 생각하면 무모했지. 암, 무모했어. 그래도 김박성 같은 선수를 모국으로 데려간 건 뿌듯한 일이였네. 자네도 김박성이라고 알지? ‘오사ダ?호랑이’ 한신의 김박성 말이야.” (계속)

 

1986년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가 마련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환영회에서 선수단과 관계자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사진 윗줄 맨 왼쪽이 한재우 감독이며, 아랫줄 가운데 이가 김박성이다(사진=스포츠춘추)

야구는 기록과 역사의 스포츠다. 1964년 9월 25일 대통령배 실업리그에서 김영덕(대한해운공사)이 기록한 퍼펙트게임을 4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공통화제로 삼을 수 있는 건 야구가 지닌 역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슬픈 전설이 있다. 재일동포 야구단이다.

한국전쟁으로 정체를 거듭하던 국내야구계에 새로운 야구이론과 기술을 전수하던 재일동포 야구단은 1997년을 끝으로 야구연감에서 사라졌다. 장훈, 김성근, 배수찬, 김박성, 황진환, 박귀홍 등 훗날 한·일 야구계의 거목으로 성장한 대스타들이 재일동포 야구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찾았다는 사실조차 잊힌 지 오래다.

<스포츠춘추>가 야구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수차례의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슬픈 전설’의 뒤를 밟았다.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시리즈 우승멤버로 활동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전 감독 한재우(73,일본명 니시하라 교지)씨의 인생을 되짚는 방식으로 ‘슬픈 전설’에 접근하려 한다. 기사는 총 5편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1편에 이어) ‘오사카의 호랑이’ 한신의 김박성(金博成)이라, 그게 누군지 궁금했다. 일본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에서 뛰는 재일동포 선수라면 가네모토 도모아키, 히야미 신지로(황진환), 아라이 다카히로(박귀홍) 가운데 한명일 게 틀림없었다. 이 가운데 ‘김’씨는 한국명 김지헌(金知憲)으로 알려진 가네모토가 유일했다.

“그전에 말이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을 조직하기 위해 얼마나 악전고투했는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 훗날 동포 야구단을 다시 조직할 때 혹여 노하우가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지그시 눈을 감으며)해마다 꽃피는 봄부터 선수들을 찾아 길을 떠났네.”

1969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감독을 맡은 이후부터 한재우는 봄 고시엔대회(선발고등학교야구대회)를 시작으로 선수선발 작업에 들어갔다. 이유가 있었다.

“봄 고시엔대회에 출전할 정도면 강팀이 분명했네. 여름 고시엔대회도 출전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지. 그런데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모국을 방문하는 시기가 늘 8월이었다는 게 문제였네.

(고개를 끄덕이며)맞네. 여름 고시엔대회(일본고교야구선수권대회)와 모국방문 일정이 겹쳤던 거야. 어린 선수들에겐 모국방문경기보단 평생의 추억으로 남을 고시엔대회 출전이 더 중요한 법이었네. 본인들도 그렇지만 학교도 내심 고시엔대회에 출전하길 바랐네. 그래 어쩔 수 없이 봄 고시엔대만?보면서 여름고시엔대회 출?가능성이 높은 팀은 제쳐 둬야 했다네.”

한재우는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일본 전역의 3천개 고교야구부 가운데 일단 여름 고시엔대회 출전 가능성이 낮으나, 야구명문으로 통하는 200개교를 추렸다. 그리고 각 학교에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의의와 활동을 설명하고 재일동포 선수가 야구부에 있는지, 있다면 포지션과 활약 정도를 알려달라는 협조문을 보냈다.

“50, 60통의 회신이 왔네. 그 가운데 재일동포 선수가 있다는 회신은 대개 10% 정도에 불과했네. 운이 좋으면 20%가 될 때도 있었지. 만약 해당 학교가 간사이(관서)지방에 있으면 학교로 찾아가 연습을 지켜보거나 고시엔대회 지역예선을 쫓아다니며 선수들을 일일이 체크했네. 직접 선수와 만나 의향을 묻기 전 관찰의 시간이 필요했거든.”

한재우 감독은 전일본고등학교 주소와 연락처가 적힌 전화번호부만한 책을 토대로 그만의 리스트를 작성했고 200개가 넘는 학교에 협조문을 보냈다. 그리고 6, 7, 8월 3달 동안 일본 전역을 돌며 재일동포 선수들을 찾아다녔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선수 선발은 부모 설득이 관건

선수단 구성을 위한 본격적인 작업은 여름 고시엔대회 본선진출 고교가 확정되는 6월부터 시작했다. 이때부터 8월까지 일본 전역을 돌며 직접 학교 관계자와 선수를 만나 동포 학생야구단 참가를 설득하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꼭 데려가야 하는 선수가 있다면 어디든 찾아갔네. 거리는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지. ‘데려 갈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었네. 처음에 한국에 가자고 하면 8할이 싫다고 했네. 고작 2할 정도만이 자발적으로 가겠다고 했지. 8할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었네.”

설득의 주 대상은 선수보다는 학부모였다. 선수가 거절해도 학부모가 ‘OK’하면 그만이었다. 당시 재일동포 사회는 한국이 헐벗고 가난해도 마땅히 모국을 방문해 뿌리를 체험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거의 전부에 가까운 재일동포 부모가 자식의 한국행을 환영했고 적극 후원했다. 1969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김기태(일본명 가네시로 모토야쓰)가 그런 경우였다.

고노하나학원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기태는 중학교 시절부터 빼어난 투구로 명성이 높았다. 그해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첫 지휘봉을 잡은 한재우가 팀의 선봉장으로 김기태를 점찍은 건 놀랄 일이 아니었다.

“김기태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하기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도 교류가 있던 사람이었네. 처음에 ‘한국에 가자’고 하니까 김기태가 시큰둥했다고. 그런데 아버지가 ‘가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하고 태도를 바꾸는 거야(웃음).”

훗날 일본프로야구 개인통산 68승66패92세이브를 기록하며 1974년 센트럴리그 다승(20승), 탈삼진(207) 2관왕에 오른 바 있는 김기태는 아버지의 한마디에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신 타이거즈에 뛰고 있는 히야마 신지로도 아버지의 권유와 자신의 의지가 더해져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이 됐다. 하지만 늘 선발이 순조로웠던 건 아니었다. 반대였다. 역시 고시엔대회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1986년 청보 핀토스에서 뛰기도 했던 재일동포 김기태는 한국에서 뛴 동포 선수 가운데 프로야 경력이 가장 화려했던 이였다. 역동적인 투구폼의 잠수함 투수로 한때 시즌 20승을 거두기도 했지만 교통사고로 내리막길을 걸은 비운의 선수다

일본프로야구의 ‘사이 영’으로 불리는 400승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김경홍)는 야구가족으로 유명하다. 그의 동생, 아들, 조카도 모두 야구선수로 뛰었다. 그 가운데 조카 가네시로 아키히토(한국명 김소인)는 히로시마, 니혼햄, 요미우리를 거치며 개인통산 72승61패80세이브를 기록한 투수다.

“1977년 일걸세. 가네시로가 야구명문 PL학원고에 다니고 있었네. 부모뿐만 아니라 학교와도 다 얘기가 끝나서 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방문하기로 參? 몇 밤만 자면 출국이어서 가네시로 짐 가방을 우리 집에 보관하고 있었네. 그런데 허허.”

여름 고시엔대회 출전이 불가능한 것으로 예상됐던 PL학원고가 기적적으로 본선진출이 확정된 것이었다. 가네시로는 눈물을 머금으며 모국행을 접어야 했다. 이와 비슷한 선수로 니우라 히사오(한국명 김일융)도 있다. 니우라 역시 갑작스런 고시엔대회 출전으로 한국행이 무산됐다.

한재우는 누구보다 아쉬운 선수로 1992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합류시키려 했으나 좌절된 한 선수를 꼽았다. 그 선수 역시 PL학원고 출신으로 당시 팀의 에이스였다.

“PL학원고에서 이미 확인을 해줬다고. 재일동포 선수가 맞다고. 학교에 찾아갔지. 당시 감독이 나보고 ‘직접 이야기해보라’는 거야. 그래 ‘한국에 갈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지. ‘어렵겠다’는 거야. 그때 PL학원고가 고시엔대회에 가니 마니 했거든. 결국 고시엔대회 본선에 올랐지. 그래도 선수만 좋다고 했으면 나와 감독이랑 원체 친했으니까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그가 누군지 궁금했다. “왜 ‘마쓰이’라고 있잖은가. ‘마쓰이 가즈오’라고.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뛰었던 선수 말이네. 요즘은 메이저리그에서 뛰던데 말이야.”

마쓰이 가즈오는 PL학원고 재학 시 한국에 올뻔 했다. 그러나 여름 고시엔대회를 눈앞에 둔 상태라 끝내 한국땅을 밟지 못했다. 한재우 감독이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선발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선수 가운데 한명이다. 참고로 한 감독은 "마쓰이가 총련계는 아닌 것으로 안다"고 말했는데 오사카 취재 시 만난 총련 측의 관계자는 "동포는 맞지만 우리쪽(총련)이라고 들어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사진=가와사키)

가장 버거운 상대, 이데올로기

“나카무라 다케시(한국명 강무지)도 기억에 남는 선수네. 원체 고생을 많이 했거든.”한재우의 얼굴에 꽃물이 번지듯 미소가 그려졌다.

좋은 포수를 찾아 헤매던 한재우에게 하나조노고의 주전포수 나카무라는 영입 0순위였다. 한국행을 설득하기 위해 교토까지 찾아간 한재우. 그러나 나카무라의 반응은 냉담했다. 계속된 설득에 넘어가긴 했지만 문제가 끝난 건 아니었다.

“방한 전 오사카에서 맹훈련을 했다고. 놀러가는 게 아니니까. 그래 오사카 이외 지역에 사는 선수들은 모두 내 집에서 재웠네. 그런데 교토는 애매했다고. 출퇴근이 가능한 지역이었거든. 나카무라가 집에서 왔다 갔다 하길 바랐다고. 오사카에서 훈련이 끝나면 교토까지 데려다 주길 반복했지. 어쩔 땐 기차를 타기도 했는데 그 더운 여름에 선풍기 하나 없이 몇 시간을 서서 갈 때도 있었지. 무엇보다 혹시나 나카무라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싶어 조바심을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닐세.”

나카무라는 1982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모국땅을 밟았고 훗날 주니치 드래건즈에서 선동열과 함께 배터리로 뛰었다. 현재는 주니치의 배터리 코치로 후진양성에 열심이다.

나카무라 이야기를 하던 한재우는 모 선수의 이름이 나오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념에 관련돼 입을 열었다.

“제일 힘들었던 게 뭔지 아나? 경비도, 선수 선발도 아니었네. 이데올로기였네. 예전만 해도 재일동포들이 여권을 만들려면 재일한국거류민단(민단)에서 허가를 받아야 했네. 해마다 민단에 가서 선수들 여권을 만들었지. 그런데 (씁쓸하게 웃으며)민단에서 여권 발급 대가로 5년간 민단 회비를 내라지 뭔가. 어쩌겠나. 선수들에게 내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말이야. 우리가 냈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

한 번은 한재우가 여느 때처럼 민단에서 여권업무를 보고 있었다. 민단 관계자가 급하게 한재우를 불렀다.
“저, 한 감독님. 죄송하지만 이 선수 여권 발급은 안 될듯합니다.” 민단 관계자가 한 선수의 여권을 되돌려줬다.
“왜 안 된단 말인가요?” 한재우가 물었다.
“이 선수 집안이 조총련이더군요. 아시다시피 총련계는 여권 발급이 힘듭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이 선수는 훗날 일본프로야구에서 엄청난 성적을 내며 대스타가 된다. 그러나 고교시절 집안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라는 이유로 모국행이 좌절된 뒤 한국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선수의 집안이 총련계가 된데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그 굴測?일반 일본학교에 다녔지만 여동생은 조선학교에 다녔네. 실은 이 선수 어머니가 이북에 남겨져 있었거든. 어쩔 수 없던 게지. 돌아보면 당시만 해도 이념이 아니라 가족 때문에 타국에서 같은 민족끼리 등을 돌려야 했던 사연이 수도 없이 많았다네.”

한재우는 “말이 나온 김에”하고 운을 뗀 뒤 “총련계 선수들을 합류시키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총련계는 민단계와는 달리 선수보다 부모 설득이 더 힘들었다. 이유가 있었다. 황당한 유언비어에 현혹된 부모들이 아이들의 한국행을 막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한국에 가면 당장 한국군으로 끌려간다”는 소문이었다.

1984년 하나조노고 3학년 재학 중 주니치 드래건즈 신인 1차 지명에 낙점된 나카무라(강무지)를 시미즈 시게루 하나조노고 감독이 축하하고 있다. 훗날 나카무라는 주니치에서 선동열과 배터리를 이룬다

당시 재일동포 사회엔 만 18세 이상의 재일동포 남성이 한국을 방문할 경우 한국 병역법에 따라 강제 입대된다는 루머가 퍼져 있었다. 특히나 총련 사회가 이 루머에 바짝 긴장했는데 이 때문에 총련계 선수들은 한사코 한국행을 거절하게 마련이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때는 가족 어느 누구도 배웅을 나오지 않았단다.

한재우는 무사히 귀환한 아들을 먼발치서 바라보며 눈물짓던 총련계 부모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총련계 선수들도 처음 한국 도착할 때는 얼굴이 새하얗다고. 불안하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국을 깨닫고 유언비어가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고. 십중팔구 일본 돌아가서 그 사실을 부모한테 말했을 것이고.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갖은 고생을 했어도 보람이라면 그럴 때가 보람이 아니었겠나 싶어. 남북을 화해시키는데 일조했다는 자부심 말이네.”

2류 선수에서 오사카의 호랑이로 성장한 김박성

“그래, 이제 ‘오사카의 호랑이’ 김박성이 누군지 알겠나?” 고개를 갸웃하자 마침 TV에 시작하던 스포츠뉴스를 가리켰다.

“저기 나오는구먼. 한신의 4번 타자 말일세.” 한신 타이거즈의 4번 타자라면 가네모토 도모아키였다. 실제로 TV에선 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도는 가네모토의 영상이 나왔다.
“그래, 가네모토일세.” 한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네모토 도모아키(41).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한신의 외야수.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야구선수. 2006년 4월 9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 경기에서 메이저리그의 칼 립켄 주니어가 세웠던 904경기 연속 ‘전경기 전타석 출전 기록’을 깬 뒤 지난 시즌까지 1330경기째 대기록을 작성 중인 철인(鐵人).

왼손 타자로 왼손에 골절상을 당했으면서도 타석을 끝까지 지켜내며 오른쪽 한 손으로 안타를 쳐낸 일화는 지금까지도 일본프로야구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다.

실력은 철인 이상이다. 센트럴리그 최우수선수(MVP) 1회, 베스트나인 7회에 뽑힐 만큼 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프로 17년 동안 개인통산 2151안타, 421홈런, 1168볼넷, 1324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통산 타율 2할9푼3리는 7000타수 이상을 기록한 선수 가운데 역대 9위이고 421홈런과 OPS(출루율+장타율) 9할2푼2리는 각각 역대 13, 10위에 해당한다. 특히나 그의 기록이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이른 바 ‘현대 일본야구’에서 세워진 것이라 의미하는 바가 더욱 깊다.

한신의 4번 타자 가네모토 도모아키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야구선수다. 오사카를 비롯한 간사이지역에선 일본수상보다 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가네모토가 재일동포 3세라고 해서 '한국인의 우수성'을 예찬하는 사례로 쓰이는 건 철지난 우생학이다. 가네모토는 재일동포이나 법적으로 일본인이며, 일본이 생활의 터전이다. 가네모토라는 대선수를 판단하는 주요 기준은 국적과 피부색이 아니라 성적과 성실함이다. 사진은 지난해 개인통산 2천 안타를 돌파한 가네모토가 기자회견장에서 환하게 웃는 장면(사진=가네모토 HP)

가네모토의 인기는 전국적이다. 올스타 선정 9회가 이를 증명한다. 오사카에선 일본수상을 능가할 정도로 영향력이 크고 절대적이다. 재미난 경험이 있다. 지난해 8월 오사카로 취재를 갔을 때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당시 일본 총리였던 후쿠다 야스오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관심을 두는 일본인은 아무도 없었다.

이어 가네모토의 부상소식이 흘러나왔다. 순간 식당의 모든 이가 식사나 하던 일을 멈춘 채 TV에 집중했다. 일단의 사람들은 가슴을 쥔 채 몹시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가네모토의 부상이 깊지 않다는 아나운서의 말이 나오자 땅이 꺼져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상에 복귀했는데. 그런 가네모토가 재일동포 3세란 건 오사카에선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원래 이름이 김박성이었다고. 도모아키(지헌)는 일본식 이름이고.” 한재우는 가네모토의 가계를 잘 알고 있었다.

“가네모토 아버지가 건설업자였다네. 집이 꽤 부유했다고. 그이 외삼촌들도 소시적 야구를 했는데 나와 막역한 사이였네. 외삼촌들이 다 귀화했던 걸로 기억이 나. 가네모토도 아마 (귀화)했지 싶은데.”

2001년 결혼과 동시에 가네모토는 귀화 절차를 밟았다. 여느 재일동포들처럼 자신보다는 가족의 미래 때문이었다. 일본 마이니치방송(MBS)의 야기 사키 아나운서는 가네모토의 아내와 절친한 사이다. 야기 아나운서는 “가네모토 씨가 경기 뒤 집에서 소주 마시는 걸 인생의 가장 큰 낙으로 삼는다”며 그가 천상 한국인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프로야구의 거목이 된 가네모토도 고교 시절에는 평범한 선수였다고 한다. 실제로 가네모토가 고료고(高)를 졸업한 뒤 주오대 야구부에 응시했다 떨어지고 1년간 재수 끝에 도호쿠복지대에 입학한 건 유명하다.

1986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방한했을 때 덕수궁에서 동료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가네모토(사진 맨 오른쪽). 이때만 해도 가네모토는 평범한 고교선수에 지나지 않았다. '지헌'이란 이름은 성인이 된 뒤 쓴 일본명으로 한국명은 '박성'이다. 같은 팀의 아라이 다카히로 역시 한국명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박귀홍(朴貴弘)'이다(사진=스포츠춘추)

“가네모토가 도쿄로 대학시험을 보러 간다고 인사를 왔었네. 나중에 듣자니까 떨어진 모양이더라고. 그이 외삼촌이 내게 ‘우리 조카 어디 갈만한 대학이나 사회인 야구팀이 없겠느냐’고 묻더군. 그때만 해도 이렇게 성공할 줄은 전혀 몰랐네.”

그 뒤 한재우는 가네모토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에 대해 누가 물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딱 한번 다시 만난 적이 있었다. 가네모토가 히로시마 토요카프에서 한창 명성을 쌓던 2002년이다.

“친구 한명이 오키나와에 구장을 갖고 있었다고. 그이를 만나러 갔는데 마침 히로시마가 그 구장에서 스프링캠프를 차렸더군. 그때 누가 내 앞에 다가와 인사를 하지 뭔가. 그래, 가네모토였네. (먼 곳을 바라보며)이제는 재일동포의 영웅에서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 스타가 됐지만. 과거에는 혹시나…혹시나 가네모토에게 ‘재일’이란 딱지가 불리하게 작용할까…그럴까봐 누가 물어도 말을 하지 않았네.”

가네모토는 열심히 연습하는 것과 기회를 기다리는 것의 가치를 아는 이였다. 그가 재일동포임에도 일본에서 어느 일본인보다 철인으로 추앙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와 똑같은 선수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도 있으니…. (계속)

 

1959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이어 동포 성인야구단이 초청돼 국내 실업팀과 친선경기를 벌였다. 사진은 동포 성인야구단의 일원으로 온 한 선수가 서울운동장 앞에서 학생들에게 사인을 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제 동포 야구단도 서울운동장도 역사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야구는 기록과 역사의 스포츠다. 1964년 9월 25일 대통령배 실업리그에서 김영덕(대한해운공사)이 기록한 퍼펙트게임을 4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공통화제로 삼을 수 있는 건 야구가 지닌 역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슬픈 전설이 있다. 재일동포 야구단이다.

한국전쟁으로 정체를 거듭하던 국내야구계에 새로운 야구이론과 기술을 전수하던 재일동포 야구단은 1997년을 끝으로 야구연감에서 사라졌다. 장훈, 김성근, 배수찬, 김박성, 황진환, 박귀홍 등 훗날 한·일 야구계의 거목으로 성장한 대스타들이 재일동포 야구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찾았다는 사실조차 잊힌 지 오래다.

<스포츠춘추>가 야구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수차례의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슬픈 전설’의 뒤를 밟았다.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시리즈 우승멤버로 활동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전 감독 한재우(73,일본명 니시하라 교지)씨의 인생을 되짚는 방식으로 ‘슬픈 전설’에 접근하려 한다. 기사는 총 5편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2편에 이어) 1969년 8월 8일 김포국제공항. 도쿄발 KAL기에서 내린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숙소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일본 시골에 온 기분인데.” 한국을 처음 본 재일동포 선수들의 첫마디는 대개 그랬다. 당시는 김포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이 지금 같지 않았다. 한강변 정비는 고사하고 5층 이상 건물은 구경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부모님한테 들은 것보단 낫네. 난 순전히 허허벌판인 줄 알았거든.”

잠자코 아이들의 말을 듣던 한재우는 흐뭇한 감정을 느꼈다.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네. 모국의 발전상을 보기 전까지 아이들은 ‘한국’하면 창피해 하거나 부끄러워하게 마련이었네. 하지만 한국의 발전상을 직접 눈으로 보면 편견은 사라지고 말지. 자네는 모를 거야. (지그시 눈을 감으며)모국에 대한 자부심이 곧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란 걸 말이네. 그게 ‘재일(在日)’의 운명일세."

하지만 마냥 미소만 지을 형편이 아니었다. 버스에 붙어있는 ‘제 12회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 환영대회’의 의미를 되새겨야 했다.

‘재일동포 야구단’과 ‘모국관광단’사이

“자, 선수 여러분. 모국방문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 말을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한재우는 선수단을 옥상으로 모았다.
“우리는 관광을 하기 위해 방한한 게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침착했다. 순간 귀제비 한 마리가 그를 스치고 대기를 가른 뒤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경기가 목적입니다. 같은 또래의 동포선수들끼리 선의의 경기를 통해 우정을 다지고 서로의 야구실력을 견주는 게 모국방문의 가장 큰 목적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모국의 야구팬들에게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드려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십시일반 경비를 마련해준 동포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합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한여름 밤의 옥상에서 한재우와 선수들은 선전을 다짐했다. 한재우는 지금처럼 의지만 확실하다면 4일 뒤인 12일부터 27일까지 펼쳐질 16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신재기 코치의 생각은 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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