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최신 군사학 연구동향> 국가전략의 충돌…그들은 왜·어떻게 싸웠나?

  작성자: 최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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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6-30 10:51:17

6·25전쟁에 관한 주요 저작 소개

美·中 전력 낭비 위한 스탈린 계책
‘왕따’ 당한 마오쩌둥 가장 손해?
中 참전 독자 결정·인천상륙작전 예상
협소 관점 탈피 전 세계 경합·충돌 


마오쩌둥(앞줄 왼쪽)과 스탈린(앞줄 오른쪽)의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마오쩌둥(앞줄 왼쪽)과 스탈린(앞줄 오른쪽)의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우리는 6·25전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1990년대부터 구 소련과 중국의 기밀자료들이 비밀해제되면서 6·25전쟁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주요 저작을 중심으로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새로운 연구의 물꼬를 연 것은 소련·미국·중국 학자의 공동연구인 『흔들리는 동맹: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전쟁』이었다. 여기서 저자들은 새롭게 해제된 기밀문서를 바탕으로 6·25전쟁에서 소련의 역할과 중국의 참전 이유를 밝히고 있다. 저자들은 소련이 김일성의 남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허락한 것은 미국의 군사력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참전할 경우 중국을 내세워 싸우게 함으로써 양국 모두 전력을 낭비하게 될 것이고, 중국과 서방이 가까워지는 것도 차단될 것이다. 그 사이 소련은 동유럽과 다른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에서 이루어진 전쟁이라고 설명한다. 전쟁 초기 유엔 안보리에 소련 대표가 불참함으로써 미국 주도의 개입을 순탄하게 만들어준 것도 이런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탈린의 대전략, 미국과 중국의 전쟁

사실 중국은 대만을 해방(병합)하고 나면 국가발전을 위해 서방과 관계를 개선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 국공내전 말기에 간접적으로 미국과 접촉을 시도했다. 미국이 내전 말기 국민당을 지원하지 않은 거나 1950년 1월 미국의 방어선에서 대만과 한국을 제외한 것도 중국을 배려한 조치였다. 스탈린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이를 차단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후 많은 연구들은 6·25전쟁의 발발과 중국의 참전이 스탈린의 대전략의 결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스탈린은 남한 적화야욕에 불타는 김일성을 부추겼다. 마오쩌둥에게 미군이 개입할 경우 중국이 참전한다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자신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미국과 중국을 전쟁의 수렁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트루먼의 국가전략과 6·25전쟁

리처드 스론턴의 『왕따: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과 6·25전쟁의 기원』도 6·25전쟁을 스탈린과 트루먼의 국가전략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저자는 서울 점령 후 3일간의 체류나 북한 주력의 호남지역 진격, 7월 중국의 참전요구의 묵살, 낙동강전선의 지원 부족 등 북한군이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빼앗았다고 주장한다. 미군이 진격해 중국군과 싸울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는 것이다. 휴전협정에 양보하지 말도록 권유함으로써 2년간이나 전쟁을 지연시킨 것도 스탈린의 결정이었다.

그렇다고 6·25전쟁이 스탈린의 대전략만 작동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국가전략 역시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다소 근거가 부족하지만, 트루먼 역시 전쟁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인들은 고립주의적 경향을 띠면서 국방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그러나 1949년 9월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10월 중국의 공산화를 계기로 심각한 안보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1950년 1월 작성된 국가안보전략문서(NSC-68)에 나와 있듯이 공산진영으로부터의 안보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국방비를 5배 이상 늘려야 했다.

결국 ‘왕따’는 마오쩌둥이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김일성의 야욕에 의해서든 소련의 부추김에 의해서든 6·25전쟁의 발발과 중국의 참전으로 실질적으로 그들이 지향했던 국가전략은 좌절됐다. 개전과 함께 미국 함대가 대만 방어에 나섬으로써 대만 해방의 꿈은 사라졌다. 유엔군과의 전쟁은 서방과의 관계개선을 수십 년간 지체시켰다. 스탈린과 트루먼이 자신들의 숨겨진 국가전략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결국 가장 큰 손해를 본 것은 중국이라는 지적이다.



중국의 독자적 참전 결정

션즈화가 집필한 『마오쩌뚱, 스탈린과 조선전쟁』은 중국과 소련이 주고받은 전문과 기록, 그리고 인터뷰를 통해 중국의 참전 결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중국은 전쟁 초기부터 미국이 38선을 넘을 경우를 대비해 25만의 동북방변군을 대기시켰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10월 19일 압록강을 넘어 참전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팽팽한 긴장과 갈등을 겪게 된다. 원래 중국이 참전할 경우 소련이 공군지원을 책임져 주기로 했는데, 막상 참전을 앞두고 스탈린이 갑자기 발을 뺀 것이다. 처음에 마오쩌둥은 소련의 약속 위반에 분노하며 중국군의 이동을 중단했지만, 곧 소련의 도움이 없더라도 독자적으로 참전할 것을 결정한다. 북한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지만 미국에 대한 분노, 새로운 가능성 등이 복잡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주목을 요하는 것이 비교적 개전 초인 1950년 7월에 이미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참전 의사를 밝혔다는 점이다. 7월 12일 마오쩌둥은 “만일 북한이 원한다면 중국은 군대를 파견할 수 있다”고 전문을 보냈다. 김일성은 환영했지만, 스탈린의 완곡한 반대로 무산됐다. 이때 중국군이 참전했다면 낙동강전선은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이 참전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고 스탈린이 비판받고 있는 부분이다.

재미난 것은 중국 지도부는 인천상륙작전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8월 초 마오쩌둥은 북한대사에게 “적이 인천으로 상륙할 수 있으니 병력을 재배치할 것”을 권했다. 9월에는 “북한군의 전략적 후퇴”를 권고했지만, 김일성은 냉소적으로 거절했다. 중국의 권유를 따랐다면 작전의 결과는 참혹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가장 중요한 논란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참전 여부가 관건이었다.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을 낮게 봤다. 설령 참전한다 해도 미공군력으로 충분히 제압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10월 7일 북진을 허용하는 유엔결의안이 통과되자 유엔군도 한국군을 따라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을 비롯한 많은 서방 국가들은 북진이 중국의 개입을 불러올 것을 우려했다.



영국의 완충지대론과 11월 대공세

윌리엄 스톡의 『한국전쟁의 국제사』는 6·25전쟁을 남북한과 미·중·소 3대 강국의 역학관계에서만 생각하던 협소한 관점에서 벗어나 전 세계 국가들이 다양한 입장에서 경합하고 충돌하는 과정으로 그리고 있다. 국경까지의 북진을 막았던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과 서방 국가들이 제시했던 ‘완충지대론’이다. 유엔군이 북위 40도선 근처 ‘한반도의 목’이라 불리는 잘록한 선까지만 진격하고 그 이상 지역은 완충지대로 두자는 것이다. 중국의 개입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미국은 오히려 북한 상공에 등장한 소련 전투기를 쫓기 위해 만주지역을 넘어갈 수 있는 추격권을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중국을 무시했다.

특이한 것은 1차 공세에서 한국군을 궤멸시켰던 중국군이 11월 7일부터 군사활동을 멈춘 것이다. 미국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중국 쪽 자료들은 마오쩌둥이 독자적인 참전을 결정했던 10월 13일 회의에서 논의된 중요한 사실을 담고 있다. 유엔군이 평양-원산선에서 진격을 멈출 것이며, 그 이북지역은 한국군만 작전을 벌이게 될 것이라는 정보였다. 그렇게 되면 중국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북한 북부지역을 장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북진을 중단할 마음이 없었다. 다 이겨 놓은 전쟁을 어정쩡하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맥아더는 대공세를 준비했다. 크리스마스 전까지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11월 24일 시작된 유엔군의 공세는 참혹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길을 따라 단순하게 진격하는 유엔군을 중국군은 자루로 쥐를 잡듯 포위했다. 중국군이 자랑하는 은밀한 기동에 의한 포위섬멸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28일 맥아더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을 맞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한국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연구대상은 6·25전쟁이다. 전통적 해석을 넘어서는 새로운 연구들도 많이 발표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국가전략과 전쟁지휘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발발 70주년을 맞아 6·25전쟁에 대한 논의가 더욱 풍성해지길 기대한다.

최 영 진 교수중앙대 정치국제학과

최 영 진 교수중앙대 정치국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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